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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릴적, 안 좋았던 기억?

철없던 어린 시절, 욱하는 마음으로 난 아버지께 칭찬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며 아버지께 투정부린 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는 웃으시며 “넌 어떻게 안 좋은 기억만 골라서 하고 있냐?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냐?” 라고 반문하셨다. 난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야속하게도 부자지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들어주셨다. “아이고 이놈아. 아버지가 널 얼마나 아끼고 좋아 했는데 그런 말을 하고 있냐. 안 좋았던 기억만 하고 있으면 어떡하냐. 또 혼났어도 대부분 네가 잘못해서 혼난 것들이지, 아버지가 이유없이 널 혼낸 적은 없다” 라고 꾸중하신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난 아버지와 좋았던 기억들보다 혼이난 기억만을 가슴에 간직한 채 괴로워했던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통계적으로도 아버지가 내게 해 주신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 그리고 내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정작 본인은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포기하셨던 가슴 짠한 추억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왜 나는 내 인생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사하고 기분 좋은 기억보다 안 좋았던 추억들만을 계속 기억하며 괴로워 하고 있을까. 나의 편집된 기억이 과연 나와 아버지와의 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부정과 편견 

무슬림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예일대학교의 역사학자 라민 사네(Lamin Sanneh)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부정적인 부분만 기억하며 그 기억을 극대화 시키고 있으며 서로를 적이라고 규정짓고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행동은 중단해야 한다. 이슬람이나 기독교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 본질이 흐려졌다. 더불어 대다수의 무슬림이나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반대되는 극단주의자들의 행동과 신학이 자신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으로 오해되었고, 이로 인해 서로를 적으로 규정짓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종교 발전사와 서로의 경전을 가만히 살펴보기만 해도, 서로 깊은 오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오해를 바탕으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겉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소수의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로 인해 대다수의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은 각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포기하면 안된다. 더 이상 부정적인 기억들로만 서로를 기억해선 안된다.”




그렇다. 부정적인 기억들과 긍정적인 기억들중에서 빨리 잊혀지는 것은 좋은 기억들이고, 강하게 머리속에 각인되는 기억은 비록 횟수가 적지만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기억들이다. 수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긍정적인 기억들은 애써 기억해야만 겨우 하나씩 떠오르지만,부정적인 기억들은 애쓰지 않아도 초능력 같이 기억에 각인된다.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교육들과 선입견들은 나의 기억속에 뿌리 깊이 각인되어 있지도 않은 망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낸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고 내 머리속 어딘가에 꽈리를 틀고 자리를 잡아 타종교와 타종교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든다. 


이런 기억으로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타종교와의 공존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뿌리 깊은 부정(negativeness)의 나무에서 어떻게 긍정의 열매가 맺혀지겠는가. 타종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첨단문명과 다원주의 사회 그리고 국제관계 속에서 감당해야 할 공동목적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극단적인 진리대결구도 속에서 긴장만 남게 된다면 결국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말했던 문명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각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들 대신 긍정적인 기억들을 되살려보자. 그 기억들로부터 대화를 시작해보자. 분명 대화가 달라질 것이다. 



다양성 속의 존중

얼마 전 마케도니아 대통령 조르게 이바노프(Gjorge Ivanov)의 “마케도니아의 공존 모델 (The Macedonian Model of Coexistence)”이라는 연설을 듣게 되었다. 내용인 즉슨,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종교에 대한 공공정책이 과거에는 “동화를 지향하는 통합(Integration with assimilation)이었으나 현재는 “동화를 지양하는 통합(Integration without assimilation)”이 되었고, 과거에는 “다양성 속의 관용 (Tolerance in diversity)”이었는데 현재는 “다양성 속의 존중 (Respect in diversity)”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이바노프 대통령은 각각의 다양성은 서로 동화됨 없이 보존되어야 하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Volf)의 [배제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 IVP)]을 인용하며 다음의 말로 마무리했다. 



“타인이 없다면 관용도 없다. 그러나 관용은 오직 소속감과 거리감의 적절한 균형 속에서만 가능하다 (*역자주: 나와 관계가 없고 거리감만 있다면 관용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린 관용만 추구해오지 않았고 다양성 그 자체를 존중해왔다.” 


이 정책 덕분에 종교분쟁과 인종분쟁이 많았던 마케도니아는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 상태가 이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언제까지 이상이 유지될진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힘주어 말했던 “동화없는 존중(Respect without assimilation)”에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존중'하기 시작하면 '이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해가 먼저가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중이 먼저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과 생각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서로 동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존중은 상대방의 다양한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호존중은 상호구별성을 평화적 공존 안에서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진리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100% 동의해야만 존중이 가능하다’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타종교를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거나 타종교인을 개종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사고방식도 다시 재고해 봐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노출되었던 자신의 종교적 폭력성과 역차별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모든 타종교를 굴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기독교의 진리가 가장 우월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변증하려는 마음 이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진한 마음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 그 속에는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고 종교를 통해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숨쉬고 있다. 타종교는 우리의 이웃이다. 이웃에겐 교리적이며 호전적인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보단 선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 타종교를 가진 이들이 나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대화하고 싶겠는가? 같이 있고 싶겠는가?

 

왜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가? 거꾸로 질문해보자. 기독교인들이 과연 타종교인이나 타자를 지극히 존중하는 모습을 사회 속에서 보여 왔는가? 존중 없는 진리 선포는 진리를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로 만들어 버리고 상대방의 뇌리 속에 진리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만 남겨 놓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를 공적인 영역과 자신의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이들은 도리어 그것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는다. 대신 비길 데 없는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하며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과연 타종교를 지극히 존중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세대가 고민하며 풀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이지형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실천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 

나를 많이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을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사람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세계기독교학과 선교역사를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