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rguefile.com
스타벅스 스탬프 투어
얼마 전 스타벅스에서 스탬프 투어 이벤트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식사했던 연인인 후배들이 식사 자리에 오기 전에 스타벅스 모 매장에서 스탬프를 찍어 왔다며 보여줬다. 무모하긴 하지만 이제 몇 군데를 더해야 다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이들이 하는 말이, 스탬프를 찍으려면 제주도에 있는 매장에도 가야 한단다. 알아봤더니 스타벅스 스탬프 투어 매장은 총 12곳이다. 지역 분포를 보니 서울, 제주, 강릉, 진해, 전주, 부산 등의 전국 단위로 흩어져 있다. 이런 정신나간 이벤트에 기어코 스탬프를 받기 위해 투어를 나설 오덕들이 분명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스타벅스 상술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열광금지, 에바로드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소설의 주인공도 스탬프 투어를 떠난다. 그런데 스타벅스와는 급이 다르다. 이름하여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 전국을 다녀 개고생해봤자 기껏 스타벅스가 주는 선물의 노예가 되는 것 밖에 없는 처량한 결말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월드’의 스케일하며, ‘에반게리온’이 주는 오덕스러움은 뭔가 신성한 느낌까지 준다. 전설의 ‘에반게리온’ 아닌가. 어렸을 적, 동경했지만 끝내 볼 수 없었던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내게 여전히 미지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장강명 작가의 『열광금지, 에바로드』(연합뉴스, 2014)는 실제에 기반한 소설이다.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는 정말 있었던 이벤트였고, 이에 뛰어들었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에바로드>였다. 전에 신문기자로 일했던 장강명 작가는 <에바로드> 제작자인 박현복, 이종호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아마도 주인공 이름인 ‘박종현’도 그들의 이름을 조합해서 만든 것 같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작가가 승낙을 받고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쓴 것이다.
장강명 / 『열광금지, 에바로드』 / ⓒ 연합뉴스
종현과 에반게리온
종현은 일찍부터 도망가서 딴 살림을 차린 어머니와 경제력 제로인 무기력한 아버지로 인해 극심한 가난속에 살았다. 그런 종현에게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가히 충격적이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원래도 애니와 만화를 좋아했지만 <에반게리온>으로 인해 결국 종현은 대학 진학도 애니매이션을 할 수 있는 전공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종현이 대학에 갈 때쯤에는 군대를 가리라 예상했던 형이 갑자기 의대를 가겠다며 종현과 함께 수능을 보는 사건이 벌어진다. 둘의 등록금만 겨우 줄 수 있다는 아버지와 이기적인 형을 원망했지만, 돈 잡아먹는 실기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종현은 실기시험이 없는 디자인 관련 학과를 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불운한 인생의 흐름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학시절과 회사생활에서 더 심화된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고 29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장례를 마치고 형과 함께 추모공원을 잠깐 걸으며 종현은 생각한다.
뭔가...... ‘이제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 『열광금지, 에바로드』, 186쪽.
그 날, 종현은 인생을 바꾸게 될 운명과 만난다.
집에 돌아와서 에반게리온 일본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공지가 한 건 떠 있었다. 공지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기네스북 등재 목표! 사상 최강 스탬프 랠리! 에반게리온 월드 스템프 랠리 개최!’
- 『열광금지, 에바로드』, 186-187쪽.
ⓒ EBS <지식채널e - 행복한 오타쿠> 화면 캡쳐
월드 스템프 랠리.. 그리고 <에반게리온: Q>
이후부터 종현은 ‘에반게리온 월드 스템프 랠리’에 참가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는다. 촬영은 물론 영상편집에, 심지어 OST까지 직접 작곡하기에 이른다. 역시 또 많은 어려움을 뚫고 ‘월드 스템프 랠리’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종현은 한국에서는 개봉이 불투명한 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기 위해 일본까지 가게 된다. 루리웹에서 만난 일본 유학생 오덕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또 다른 한국 오덕 한 명 그리고 종현, 이렇게 셋이서 <Q>를 함께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까지 건너와서 어렵게 본 <Q>가 말썽이었다. 전작인 <에반게리온: 파>로부터 14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되는 <Q>는 너무 많은 설명을 감춘채 그간의 <에반게리온> 시리즈와는 매우 다른 난해한 작품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함께 <Q>를 본 셋은 어떻게든 작품을 이해해보려고 갖은 추측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수다를 펼쳐보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 동안의 ‘월드 스템프 랠리’의 여정에 찬물을 끼얹는 허무함에 당황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종현의 각성은 <Q>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된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이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종현의 각성
종현은 다른 두 오덕들과 달리 <Q>의 난해함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신화화 되었던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지게 된다.
그는 <Q>가 관객 모독이라고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안노를 포함한 에반게리온의 제작진이 유능하며, 보통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갖지 않는 고매한 야심을 품었다고도 믿었다...(중략)
그러나 제작자들은 그 작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작진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구약성서의 상징을 인용하고, 밑도 끝도 없는 비유를 들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읊조렸다. 종현은 이제 그런 위장과, 그 아래 깔린 작가들의 절박함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 『열광금지, 에바로드』, 243-244쪽.
<에반게리온 Q>
<Q>의 몰락에도 종현은 무너지지 않았다. 종현에게 에반게리온은 힘겨운 십대와 이십대의 시간을 보내오면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고 피난처였다. 종현은 삶의 무게에 속박당해 있으면서도 에반게리온을 향한 오덕질을 하는 순간 만큼은 자유로웠다. 그가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오덕질에서 비롯된 ‘에반게리온 월드 스템프 랠리’에서는 모든 것을 그가 결정했다.
한 번 성역을 넘고 나니 더 깊은 깨달음이 연속해서 찾아왔다. ‘내가 왜 에반게리온에 빠졌던가’에 대해 종현은 다시 생각했다. 첫 감상에서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하다’는 위안을 받은 뒤로 이 시리즈에 자신이 헛된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장르 전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멸시에 저항하면서 애정을 더 깊이 키워나갔고, 그러다 마침내는 상대에게 없는 장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아니었을까. 여러 소년만화 중 가장 심오해 보이는 에반게리온이 실제로도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기를, 그나 제작진이나 너무 간절히 바랐고, 나중에는 그게 어떤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에반게리온이 자신의 감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열광금지, 에바로드』, 244-245쪽.
에바로드에서 만난 기독청년들의 문제
종현의 깨달음의 절정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한국교회 청년들의 자화상을 감지했다. 종현이 스스로에게 던진 의미에 대한 질문은 기독청년들에게도 유효하다. 종현의 질문을 ‘나는 왜 기독교에 빠졌던가’로 바꿔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소위 첫사랑이라고 불려지는 신앙의 초기 감정에서 만났던 위안들에 대한 추억만을 떠올리며 맹목적 신앙에 발을 디뎌 버린 많은 청년들과 종현의 폐쇄적 오덕질은 서로 묘하게 닮아있다. 아름다워야 할 신앙과 교회생활은 청년에게 또 다른 의미의 감옥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철저히 주관적이면서 상대적인 사적 신앙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종현의 깨달음은 기독청년신앙의 결핍이라는 주제로 내게 새롭게 치환되어졌다.
그러나 종현은 폐쇄적 오덕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의 오덕질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유랑이었기 때문에 이런 각성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청년들이 갇혀 있는 신앙적 감옥에서의 탈출 힌트도 종현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힌트가 바로 ‘자유’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의 온갖 오덕질은 대부분 어른들에게 참 쓸데없고 무의미한 방황으로 여겨진다. 아니, 치부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인생의 먼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의 일도 장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단함에 대해 어른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청년들의 오덕 행위를 더욱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그들이 뭔가에 빠져드는 것을 너무 쉽게 사치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이런 오해는 또 다시 지난한 꼰대질로 귀결될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당면한 미래다. (ⓒ Morguefile.com)
청년들에게 자유를
오덕 행위의 근본적 갈망은 주체적 몰입의 자유에서 나온다. 종현처럼 수많은 청년들도 순수한 몰입과 주체적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때 청년들이 잠시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는 순간은 각자의 오덕질 때 뿐이다. 그 오덕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열하는 것은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짓이다. 물론 오덕질은 소설속 유학생과 수험생처럼 폐쇄적 자기 만족에 갇힐 위험성도 존재한다. 교회와 어른들은 이 위험의 가능성을 경찰차벽 마냥 차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공동체의 고민은 그런 위험조차 감수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안정’의 가치보다 ‘자유’의 가치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청년에게는.
전통과 당위성만으로 청년을 끌고 가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 고유의 자유와 오덕질을 용납해줄 순 없을까. 어차피 청년이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면 아무리 식탁에 끌어 앉혀도 답을 떠먹여 줄 수 없다. 표면적 역동성과 고분고분한 순종 정도만 기대하는 어른, 그리고 사역에 대한 야망 또는 방어적 자세로만 청년을 대하는 교역자가 청년을 속박하고 있다는 사실, 인정해야 한다. 편견과 통제의 문을 열어 청년과 함께 걷는 교회만이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청년을 대상화 시키지 말자. 그들을 속박하면 결국 우리도 갇힌다. 그들은 우리의 당면한 미래다.
송지훈 / 성서한국 사무국 간사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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