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는 왜 히틀러를 겨냥했는가?
[서평] 매튜 D. 커크패트릭, <디트리히 본회퍼 -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 (비아, 2015)
글. 홍동우 _20150429
과연 본회퍼라면?
시대가 어둡다. 세월호 이전에도 충분히 어두웠다. 하지만 세월호 이후에는 어두움이 도를 넘었다. 신학강단에서 사변적으로 선포되는 가르침은 이미 힘을 잃었다. 신학은, 우리들의 신학은 과연 세월호를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신학인가? 그들에게 위로를 전달해줄 수 있는 신학인가? 아직 미답지의 영역이다. 따라서 신학 강단은 힘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교회 강단 또한 힘을 잃었다.
이런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우리들의 세상,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만 할까? 개인적으로는 ‘본회퍼’가 떠올랐다. 그가 살았던 시절이 오늘날의 시절과 흡사하기에. 또한 그의 치열한 고민과 고뇌를 한번 쯤은 읽어봐야 했기에. 고로 본인은 매튜 D. 커크패트릭의 『디트리히 본회퍼 -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라는 책을 선택했다. 본 책의 원제는 『본회퍼의 윤리학』이지만 그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본 책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암살 작전에 가담하기까지의 그의 실존적 고뇌와 신학적 발전과정을 촘촘히 다루었다. 특별히 본인은 본 책에서 ‘본회퍼의 시대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독일신학’과, 그가 생각한 ‘윤리학’과, 그 결합으로 만들어진 ‘순교자로써의 결단’ 부분을 읽어내고 요약하고자 한다. 또한 짧지만 그에 더해서 오늘날 바로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본회퍼의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한다.
공허와 혼돈
본회퍼가 살았던 시기는 오늘날의 한반도 땅과 흡사하다. 온갖 공허함과 혼돈함이 사회를 감싸고 있었다. 그 어떤 정의와 공평의 찰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라는 반-하나님나라적 시스템에는 여실히 그 공허와 혼돈이 나타났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포하는 온갖 하나님나라적 메시지 이면의 신학에도 그 공허와 혼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신학들이 애초부터 공허와 혼돈을 품어낸 신학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먼저 공허와 혼돈을 흠뻑 품어내고 있는 신학으로써 루터의 ‘창조질서'에 대한 신학을 짚어낸다. 루터의 ‘창조질서’에 대한 신학은 하나님이 이 사회 속에 특정한 ‘질서’ 혹은 ‘구조’를 만들어내셨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 국가, 가정, 노동이 이에 해당하며 이 질서들은 인류가 평화롭게 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분 혹은 계급을 바꿔내는 사회이동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지금 여기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순복하고 있는가? 그 사실이 중요하다. 이 ‘창조질서’에 대한 신학은 결국 본회퍼가 그토록 분노했던 공허함과 혼돈함을 흠뻑 머금은 독일 사회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자세한 사항은 뒤이어 살펴보자.
또한 이어서 저자는 본회퍼 당시의 사회의 원흉이 되었던 두 번째 신학인 ‘두 왕국론’을 짚어낸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질서를 일궈내기 위해 교회, 그리고 국가라는 두 왕국을 만들어냈다. 루터에 따르면 교회는 영혼의 문제를 살필 책임을 맡았고, 국가는 정의의 칼을 휘두를 책임을 맡았다고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꽤나 말끔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체제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이자,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써의 이중적 삶을 살아야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냈다고 저자는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두 왕국론 속에서 국가의 폭력이 정당화되고 합리화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해낸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두 신학을 묘하게 결합하여 루터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역사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국가를 향한 구원과 심판을 행하고 자신의 뜻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감독할 위대하고 경이로운 사람을 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누가 생각나는가? 그렇다. 본회퍼의 시대 속에서, 공허함과 혼돈함의 극치를 달리는 한 인물, 바로 아돌프 히틀러를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저자는 본회퍼가 속한 사회의 불의, 억압, 고통과 눈물 등을 단순히 사회학적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뿌리 깊게 박힌 세계관을 신학적으로 조망하고 비판해낸다. 저자의 관점은 분명하다. 바로 신학이 독일 사회를 혼돈함에, 그리고 공허함에 물들게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는 과연 가능한가?
아무리 신학이 어설퍼도, 신학 때문에 사회 가운데 혼돈함이, 그리고 공허함이 가득해졌다는 것은 핑계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신학은, 궁극적으로 실천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 실천이 결국 혼돈함을 뚫고, 공허함을 뚫고,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의 빛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우리는 신학을 배워가며, 신학을 전수하고, 또 신학을 살게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본회퍼는 결코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층적으로 바라보았다. 특별히 ‘신학’이 만들어내는 ‘윤리’에 차원에 있어서는 말이다.
본회퍼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타락이란 단순히 관계단절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단절이 초래한 모든 문제를 포괄한다. 본회퍼의 관점에 의하면 관계단절로 초래한 문제 중의 문제는 인간의 ‘뒤집힌 마음’이다. 이는 성서가 증언하듯이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맞서는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회퍼는 이러한 신학적 착상을 토대로 자연, 혹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를 ‘뒤집힌 마음이 벌이는 어리석은 시도’로 규정하며,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 자체라고 규정한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은 바로 지금, 여기서 건네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윤리학’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윤리학 또한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혹은 하나님을 모방하려는 ‘뒤집힌 마음이 벌이는 어리석은 시도’라면 윤리학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안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담대하게도 윤리학이 하나님을 향한 복종과 충돌한다고 선언한다. 아니, 오히려 윤리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적인 도약을 갈구하는 인류의 갈망을 충동질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이어서 윤리학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관계적 속성을 진지하게 숙고해내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인위적으로 제한해버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윤리학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에게 윤리학은 ‘윤리의 파괴’이며, ‘다른 모든 윤리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윤리’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보편적이고, 원칙 타당한 윤리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계명과 심판, 그리고 자비이기 때문이다.
ⓒ morguefile.
법을 넘어선 정의, 윤리를 넘어선 윤리
본회퍼는 앞에서 살펴본 루터의 ‘창조질서’를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창조질서’는 본회퍼에 있어서 절대로 정치 윤리를 위한 고정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질서’로 인정받을 수 있고, 우리의 보호와 참여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질서는 절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분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놀라운 신학적 사유가 착상된다. ‘원칙이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하다. 더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분명히 버려질 것이다’는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의 말은 ‘법 밖의 정의’를 말한 데리다의 언설을 상기시킨다.
본회퍼의 착상 속에서의 질서는 하나님이 세운 질서가 끊임없이 긍정되며, 그 결과로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질서 속에서 질서만을 숭배하지 않고, 질서를 넘어계신 하나님과 우리 개개인이 관계를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관계는 하나님이 세운 질서가 끊임없이 긍정될 때에는 별로 중요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지점, 바로 하나님의 세운 질서가 찢겨지고, 파괴되는 그 지점, 윤리적 원칙들이 실패하고, 더 이상 궁극적인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는 질서가 만들어지는 그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탁월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바로 그 지점 (이른바 히틀러 체제를 상기시키는 그 지점) 덕분에라도 본회퍼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 작전에의 가담은 여기서 신학적 당위성을 획득한다. 본디 창조질서가 긍정될 때에야 누군가를 향한 암살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일테다. 하지만 창조질서가 완전히 어그러진, 혼돈함과 공허함이 가득찬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려온다. 바로 윤리적 원칙를 넘어선 정의를 향한 그 분의 목소리 말이다. 본회퍼의 암살 작전에의 가담은 단순한 감정적 격정에서 흘러나온 충동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학을 뒤엎어낸 격변적 행동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행위는 ‘윤리적 원칙’이라는 명제 아래에, 루터의 ‘창조질서’의 신학과, ‘두 왕국론’의 신학 아래에 갇혀버린 ‘불의에의 긍정’에 맞서는 법 너머의 정의를 실현한 숭고한 행위였다. 비로소 우리는 본회퍼에 관련된 책 제목 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
본회퍼의 진지한 고민 끝자락에서
본회퍼는 시대의 흑암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소화기관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온 몸으로, 그리고 두뇌의 온 시냅스를 활용하여 그 시대의 흑암을 소화해내려 노력했다. 분명 그의 시대는 살기 힘든 시대였다. 온갖 윤리가 말하여졌고, 신학이 말하여졌지만, 진정한 윤리와 신학은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른바 ‘바리새인의 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충분히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충분히 신학적인 것처럼 보였던,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올려드리지 못했던,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회칠한 무덤의 시절. 사실 그 시절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 또한 폭발적 성장을 일궈냈고, 세계유수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름을 떨치는 수많은 한국 신학자들을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그리고 한국교회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교회이며, 윤리와 실천을 말하지만 회칠되어진, 타협되어진 윤리적 실천만이 남발하는 사회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바울식’으로 품어냈다. 특별히 바울은 ‘법’의 문제를 걸고 넘어진 사도이다. 유대인의 유산인 ‘법’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품어낼 수 없었음을, 아니 ‘법’ 자체에는 하나님의 정신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결여되어있음을 폭로했고, ‘법’ 너머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생명, 그 ‘영’을 증언한 학자였다. 본회퍼는 이런 바울의 정신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회칠한 무덤처럼 보이는 시대의 교회와 사회, 하지만 그 너머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고, 거기에 자신의 생명을 투신했다. 누군가의 책 제목처럼 목사로써, 순교자로써, 또 예언자로써, 스파이로써 그 생명의 길로 걸어간 인물이다.
그의 진지하고도 치열한 사유와 고뇌어린 생명의 투신은 우리에게 큰 감명을 끼친다. 우리로 교회가 제시하는 ‘법’을 넘어선, 사회가 제시하는 ‘법’을 넘어선, 미래로부터 오시는, 저 먼 곳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게 만든다. 바로 지금, 여기 세월호가 있다. 그리고 무수히 죽어간 영혼들의 아우성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지리멸렬하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신학도들은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신학도인 본인은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 이 지점에서 본인은 『디트리히 본회퍼 -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를 읽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나’도 그의 길을 따를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길 외에는 생명의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괜스레 한숨만 가득하다. 생명의 길은 분명하지만, 그만한 용기가 없기에.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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