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IVP, 2014)
ⒸIVP.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욕을 먹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이제는 왠만해서는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수위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막말이 공영방송을 통해 여과없이 방영되면서 교회는 자신들의 속살을 그대로 공론장에 노출시켰다. 이제 성난 시민들은 교회의 언어를 그들만의 언어로 용인하려 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몰상식하고 반인륜적인 언어로 고발해 버린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던 우리들의 언어와 사유가 이제는 공론장에 그대로 민낯을 드러냈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적실성과 타당성을 요구받게 되었다. 사적언어와 공적언어의 경계가 무엇인지, 또는 교회가 사적인 영역인지 공적인 영역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뒤로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신앙의 내적 논리와 언어가 공론장의 비판으로부터 열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징후임이 분명하다. 세속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는가?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투쟁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의 언어는 어떻게 자신의 독특성을 지키면서도 그 가치를 전할 것인가?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속화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신정주의적 통치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존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직면한 위기이자 볼프의 문제의식이다.
다원주의 속 기독교
볼프의 문제제기는 이렇다. “어떻게 종교가 공적인 영역을 자신의 주장에 따라 전체화시키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종교를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시키려는 세속적인 입장을 거부할 수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세속적 다원주의’ 사회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뒤엉켜서 서로의 가치와 생각을 존중하며 조화롭게 공존해야 할 다원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볼프의 말처럼 기독교는 이제 “현대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내부로부터, 그것도 단편적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회 참여의 결과에 대해서는 통제할 능력이 없다”(125쪽)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사회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진리를 전달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진리를 전달하느냐?’를 고민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 예언자들이 왕을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회개하라고 선포하면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한 왕이 회개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다.
볼프는 이런 다원주의 사회에서도 기독교의 목소리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태함과 강요라는 신앙의 기능장애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속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나의 목표는 기독교 공동체가 많은 행위자 중 하나가 된다는 현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서 있든지 – 주변부든, 중심부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디 있든지 – 그곳에서 인간의 번영과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120쪽)
사회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신앙은 공공 생활에서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번영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을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202쪽)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광장에 서는 것
롤즈로 대표되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정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때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간관, 사회적 가치를 거론하지 말고, 오직 절차적 정의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때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간관, 사회적 가치를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볼프가 월터스토프의 논의를 통해 밝혀냈듯이 공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배제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오히려 어긋나는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독특한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와 같은 기능들을 차단하고 순수한 절차적 정의만을 허용한다면 그 영역에서 우리는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두꺼운 것이고, 그것은 좀처럼 벗겨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볼프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영역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이러한 정체성 형성에서 찾는다.
볼프는 정체성의 형성이 차이와 경계를 통해 항상 비판적으로 재구성된다고 말한다. 볼프는 초기 저작부터 꾸준하게 소통과 대화의 신학을 추구했는데, 『삼위일체와 교회』(새물결플러스)에서는 동방정교회와 가톨릭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에큐메니칼 교회론을 제시했고, 『배제와 포용』(IVP)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타자를 통해 끊임없이 연결되고 재구성되는 자아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변 문화와 역동적으로 주고받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 (141쪽)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만 있는 고유하고 배타적인 문화적 영토, 즉 언어, 가치, 관습과 합리성을 가져 본 적이 없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어진 문화 속에서, 문화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이질적인 것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것이다. (137-138쪽)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경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정체성이 결국 수많은 타자를 통해 구성된 것이라면, 우리들의 삶은 공동의 가치와 질서를 좀 더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드는 것, 즉 인간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전 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고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신앙의 중심에서 세상과 소통하라
신앙의 내적 논리와 언어가 공적인 영역에 진입하려 할 때에는 ‘자신의 고유한 기독교 전통과 언어를 상실하면서까지 세상과의 소통과 보편성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신학이 소통과 번역의 과정이 거치게 되면, 이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종교 전통과 거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천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의 장으로 편입되기 위해 보다 추상적인 단계로 축약되거나 축소될 위험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와 특징들이 삭제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위탁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추상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 공동체에 대한 정직한 태도도,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다. 이러한 태도가 공론장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며 학문의 영역에서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전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러한 신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의 목소리는 고유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가 되고 다른 많은 목소리를 그 안에 담을 수 있게 되며 또 다른 목소리가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 나올 수 있다. (188쪽)
남아공의 공공신학자 그루시(John W. de Gruchy)는 공공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기독교신학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독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기독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와 세상 사이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 서로 중첩되는 영역과 배타적인 영역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모순이 현대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표현되느냐에 따라 기독교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공동선을 위해 세상과 협력하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때로는 권력과 야합하기도 하고, 특정한 정치적 입장과 결탁되기도 한다. 교회와 시민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기독교신학의 자리를 찾아주고 그 역할을 제시해 주는 것이 오늘날 공공신학을 향한 시대의 요청일 것이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광장에 선 기독교는 과연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 있게 전달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할 수 있을까? 또 광장에서 의사소통을 통해 도출된 합의와 결론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반추하고 비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교회가 철저한 개혁과 쇄신을 이루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볼프가 그 길목에서 작은 징검다리가 되길 소원해 본다.
최경환 / 남아공에서 공공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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