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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투에게 배우는 한국교회의 미래






투투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배우다


[서평] 데스몬드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홍종락 옮김, 홍성사, 2009)




글. 김광현  _20150827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무력한 집단이다. 21세기에 어울리는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사회적 고통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건전한 시민들은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국가에 희생당한 이들을 돌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희생의 구조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한국 교회는 아직 20세기 초 독일 신학자가 도달한 곳에도 이르지 못했다.


반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미래의 세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앞당겨 성취해 냄으로써 가장 모범이 되는 교회의 임무를 보여준 적이 있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의 저자이자, 남아공 성공회의 대주교였던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1931~)는 이 임무의 주인공이다.


데스몬드 투투


그는 영국 유학 시절 공정한 영국 은행의 서비스를 보면서 남아공의 부당한 인종차별에 대해 자각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 남아공 교회협의회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그 공로로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임무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공로를 넘어서는 곳에 있었다. 10년 뒤에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의장으로서 위원회를 이끌고 남아공 사회를 치유하는 과정을 수행한 것이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위원회가 활동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과 생각들을 정리한 그의 회고록이다.


그의 이야기는 1994년 4월 27일,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르던 날부터 시작한다. 오랜 세월 남아공을 지배했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에서 벗어나는 날이었다. 이 선거에서 남아공의 위대한 영웅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그는 곧 과거사 청산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한다.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고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곧장 새로운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이 남아공 사회에 남긴 커다란 상처는 민주 사회가 된 이후에도 갈등과 분열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지독한 인권침해였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간에 저질러진 “끔찍한 일들”이었다. 1960년 3월 21일, 평화 시위에 참가한 군중 69명이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1976년 6월 16일에는 비무장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살해당한다. 1985년 아만짐토티 폭탄테러, 1986년 마구스 바(Bar) 폭탄테러, 1983년 5월 프리토리아 처치스트리트 대학살, 1993년 7월 케이프타운의 세인트제임스 교회에서 벌어진 대학살. 이 중에는 정부에 의한 것도 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민족회의’의 소행도 있었다. 커다란 사건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사건들도 있었다. 작은 사건들이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많았다. 투투 대주교의 말대로 “아파르트헤이트는 피해자들과 집행자들 모두를 비인간화하는 데 더없는 성공을 거두었다(27).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


진실화해위원회는 반세기의 긴 세월 동안 얼룩진 남아공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임무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된 모든 범죄를 처벌하기엔 남아공의 사법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예상되었다. 남아공 정부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문제였다. 이상을 따르고 싶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상처밖에 남을 것이 없는 승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내자”고 할 수도 없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 새로운 존경받는 대통령, 새로운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은 무의미하다. 정의와 현실 사이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선택은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의 정의, 곧 응보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된 범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용서를 실현하는 것과 평화를 일구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는 사면 신청을 받고 중대한 범죄의 공개 청문회를 진행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이 정책이 어떻게 용서를 실현하고 평화를 일구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용서 없이 미래 없다』의 미덕은 범죄자들이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피해자들이 그들을 용서하면서 남아공 전체가 치유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자기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데 있다. 이 책은 용서와 평화가 개인적인 관계나 사적인 영역에서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첫 번째 증인인 전직 시스케이 방위군 사령관과 장교들이 청문회에 출석해 비쇼 학살과 관련된 내용을 증언할 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자세하고 진실하게 고백했지만, 그들이 보인 군인정신에 충실한 억제된 감정과 경직된 태도는 청중들 전체의 등을 돌리게 하고 말았다. 청중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청문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불투명했다. 청문회에서 증언할 때 반드시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짓 태도를 만들어 사면의 취지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호르스트 스호베스버거 대령이 청중을 향해 몸을 돌려 호소했다. 


“죄송합니다. 비쇼 학살의 짐은 평생 우리의 어깨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짐은 우리가 바란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피해자 여러분들께 그날을 잊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요청입니다. 다만,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군인들을 공동체에 다시 품어 주시고, 그들을 온전히 받아 주시고, 그들이 당시에 받은 압력을 헤아려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이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184).

-『용서 없이 미래 없다』


진실화해위원회 재판장면


청중들은 갑자기 엄청난 박수갈채를 쏟아 냈다. 뜻밖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가해자와 그들을 용서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을 국가 기관의 청문회 장소에서 전파를 타고 온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투투 의장은 박수 소리가 그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용서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국민입니다(183). 

-『용서 없이 미래 없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기독교 신앙과 정치는 어디까지 분리되며, 또 어디까지 분리되지 않는가’이다. 투투 주교는 성공회 대주교 신분으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의장 자리에 앉았다.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한 그리스도인이 맡은 것이다. 투투의 말대로 “용서, 고백, 화해는 종교계에서 훨씬 더 친숙한 용어다(99). 정치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종교가 그것을 맡은 것일까? 정치의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은 꼭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한국 정치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


두 번째 질문은, ‘기독교는 다른 신앙, 다른 종교, 다른 가치관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정치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이익 관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조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정치와 연결하려면 공적인 영역으로서의 객관성 혹은 상대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이때 기독교 신앙 고유의 절대성과 정치적 위치로서의 상대성은 충돌하게 된다. 무엇을 어디까지 밀고 나갈 것이냐에 따라 기독교 신앙의 색깔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용서 없이 미래 없다』가 보여 주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는, 기독교가 자신과 가장 적대적인 두 영역인 ‘정치’와 ‘타종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교회가 한 사회의 문명과 인격을 고양하는 데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각주:1]” 데스몬드 투투는 기독교 신앙을 정치와 분리된 종교, 타종교에 적대적인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첫 번째 모임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 이유도 그가 가진 기독교 신앙의 힘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위원회에는 흑인이 10명, 백인이 6명 있습니다. 혼혈과 인도인, 아프리카인이 있고 정치적으로는 좌파부터 보수적인 백인 우파까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다수지만 무슬림, 힌두교인이 있고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도 있습니다. 7명이 법률가이고, 성직자가 나를 포함해 4명입니다. 남성과 여성, 정신보건 전문의, 심리학자, 간호사도 있습니다. 각자가 걸어온 길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과 마음의 지도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의 모임을 이렇게 시작합시다. 우리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마음을 배려합시다. 그러려면 우리의 감수성을 깨워야 하고 우리의 영혼이 타인을 향해 열려야 합니다. 위원회 첫날인 오늘 하루 동안 우리의 영혼을 열어 놓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눈을 감고 묵상의 시간을 가집시다. 영적 지도자의 말씀을 들읍시다. 오늘 하루는 말을 멈추고 침묵합시다.” 

- 데스몬드 투투







김광현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박사과정에서 

그리스도교적 주체성 문제를 본회퍼 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의 수사이다.





  1.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13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