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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망각






 

용서와 기억


유학을 떠나기 전,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이끌면서 투투 주교가 겪었던 아픔과 기쁨을 감동적으로 적은 책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자신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 백인들을 끌어안으며 용서와 회복의 가치를 담담하게 서술한,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이다.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고, 가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잠재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진정 용서는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철학자가 무조건적 용서를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이를 통해 윤리적 초월을 말하는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


희생자의 기억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정의를 세우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반대로 희생자는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도 살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해 윤리적인 딜레마는 생기겠지만, 희생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남은 삶을 위해서라도 과거와의 단절은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의 기억력 감퇴는 어쩌면 하나님이 희생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은총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기억의 종말(The End of Memory, IVP 출간 예정)』은 그가 2002년에 칼빈대학교의 스톱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쓴 책이다. 이 책은 ‘폭력적인 세상에서 바르게 기억하기’(Remembering Rightly in a Violent World)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우리들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건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볼프는 그중에서도 악한 일들을 들추어내 이야기를 풀어 간다.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 누군가에게서 상처를 받고 폭행을 당했던 기억, 나아가 집단적인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morguefile



기억과 정체성


볼프는 우리의 정체성이 두 가지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는 타자의 기억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이 현재 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아프고 슬픈 기억들은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를 보다 잘 보여준다. 월터스토프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면 “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라고 소개한다고 한다. 이보다 더 진실하게 자신의 실존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엘리 위젤은 “구원은 오직 기억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가 말하는 기억이란 바로 고통에 대한 기억이다.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곳에 그들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십자가에서 발견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에게나 우리에게나 아픔과 고통의 기억이다. 그렇기에 이 기억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정체성은 나와 나에 대한 타자의 기억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 우리의 과거가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형성한 것처럼, 미래의 나를 규정하고 만들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아픔은 단순히 흘러가 버린 지난 시절 한때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을 뚫고 지나와 지금의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현재화(재현)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단순히 기억에 의존해서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매여 사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의 기억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잉여 부분, 곧 자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미래의 우리를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수 있다. 미래에서 오시는 분은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p.25).


ⓒmorguefile



기억과 구원


“구원은 기억으로 말미암는다”는 엘리 위젤의 주장을 기반으로 볼프는 기억이 구원의 수단으로써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p.27-33). 그는 치유(Healing), 인정(Acknowledgment), 연대(Solidarity), 보호(Protection)라는 네 가지 개념을 통해 기억의 위대한 힘을 보여준다.


치유 : 치유는 단순히 지난날 아픈 과거의 사건과 감정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들을 해석해 내고, 보다 큰 의미의 맥락 속에서 기억들을 다시 새겨 넣을 때 일어난다. 그러기에 치유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는 관점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고통의 기억은 개인의 치유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경험이라고 한다. 그래서 치유는 기억과 함께 인격을 해석해 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정 :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고백과 인정이 필요하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듀 토이트(Andre du Toit)는 인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보상받을 수 없고, 학대, 고문, 손해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보상받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희생자들의 인권과 시민적 존엄성을 공적으로 회복시켜 주고,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할 때, 가해자들은 비로소 공적인 영역에 나오게 되고, 그들이 희생자들에게 사죄를 구할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이다.”


연대 : 기억이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써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희생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희생자와의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치유할 수 있고, 과거를 교정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우리가 희생자와 연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치유는커녕 위험하기까지 하다. 희생자에게는 함께 공감해 주고, 그 고통을 경감시켜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호 : 희생자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희생자는 그들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희생자는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나중에 자신이 가해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억을 구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morguefile



망각의 은혜


희생자의 기억을 복원시키고 보전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이다. 희생자의 기억을 역사 속에 묻어 둘 때, 우리는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은 희생자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하여금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의 효과를 가져 온다. 그래서 폴 리쾨르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 수행능력이라 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인간만이 진정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이다. 희생자의 고통을 망각한다는 것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다. 따라서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희생자를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감추어졌던 역사 속에서 그들을 구속하는 것이 참된 정의이고 윤리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 후에 망각은 새로운 의미 부여를 받게 된다. 망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기억의 악몽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자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통해 정화되고, 회복된 기억은 이제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 나가기 위해 망각의 도움을 필요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희생자의 미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희생자와 가해자는 서로를 치유하고 동시에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경험되는 망각은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최경환 / 남아공에서 공공신학을 공부했다. 

<광장,청춘>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