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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보컴과 복음서 저자의 실종


 


 

명탐정 보컴과 복음서 저자의 실종






[서평]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예수와 그 목격자들> (새물결플러스, 2015)

글. 여정훈  _20150703 

 





우스갯소리지만 한국 신약학계에는 세 유령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체드 마이어스(Ched Myers), 그리고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저술이 그것들이다. 저 유명한 학자들의 작품을 유령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국내 논문에 매우 빈번하게 인용될 정도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그것들이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운 일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저들의 주요 저작이 한 권씩 번역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IVP, 2007)은 번역되었고, 올해에는 드디어 보컴의 <예수와 그 목격자들Jesus ans the Eyewitnesses>(새물결플러스, 2015)의 한국어판도 출간되었다. (하루 빨리 마이어스의 Binding the Strong Man 번역본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사감이지만 신약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방대하고 난해한 <예수와 그 목격자들>를 번역한 박규태 선생에게 감사를 표한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예수와 그 목격자들』은 매우 잘 쓴 책이다. 보컴은 방대한 배경지식을 활용하는 한편 성서를 치밀하게 분석해 복음서가 “목격자 증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주장을 도출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위해 그는 우선 중요한 장애물을 먼저 제거한다. 그 장애물이란 다름 아닌 “양식비평”이다. 양식비평을 따르면, 복음서를 구성하는 자료들은 대중적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교육과 예배 등을 위해 기존 구전문학의 구성요소들을 받아들이거나, 새로 창작된 것이다. 하지만 보컴은 비르예르 에르핫손(Birger Gerhardsson) 등의 양식비평 비판자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예수와 함께 활동한 이들이 예수 사후 갑자기 사라지지 않은 이상 양식비평의 주장은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양식비평의 가정이 틀렸다면 과연 어디서 복음서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보컴이 제시하는 대안은 초기 교회의 저술, 특히 2세기 초의 것으로 알려진 파피아스(Papias Hierapolis)의 주장이다. 파피아스는 대중적 전승이 아니라 목격자 진술을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보컴을 따르면 그러한 노력의 배경에는 그리스적 역사 서술의 영향이 있다. 그리스적 역사 서술은 외부 관찰자 보다는 사건의 참여자가 증언한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파피아스는 마르코(마가) 복음을 베드로의 증언으로, 마태오(마태) 복음을 마태오의 증언으로, 요한복음을 장로 요한의 증언으로 받아들였다. 보컴이 보기에 복음서는 목격자로 시작해 목격자로 끝나는 인클루시오(inclusio) 구조를 띠고 있다. 이 점이 파피아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파피아스(Papias, 약 60~130) 



복음서의 구조를 분석하는 보컴의 작업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는 마치 유능한 탐정이 조작된 증거들과 오해 사이를 헤쳐나가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아내듯 양식비평과 문학비평의 주장들을 하나씩 반박하며 파피아스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감동적인 드라마다. 현대의 학자들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돌린 파피아스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파피아스가 복권됨에 따라 예수를 눈으로 보고 따랐던 목격자들에 대한 불신 또한 안개 걷히듯 걷힌다. 현대의 악당들이 예수와 교회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애물들은 명탐정 보컴에 의해 무력화되고, 우리는 마침내 예수의 진정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계시"인 예수다.

 

보컴의 시나리오는,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직접적임 목격담으로 이끄는 것이기에, 부분적으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완벽함이 주장의 신뢰도까지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경의 이야기들을 너무 쉽게 믿는다. 그는 심지어 라자로(나사로)의 소생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마르코 복음이 기록하지 않은 라자로 이야기를 왜 요한은 기록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라자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마르코의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라자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의 중심에 있었기에 마르코가 그를 보호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적적 병고침, 풍랑을 향해 명령한 사건,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록 모두에 일단 신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때문에 우린 다시금 양식비평의 문제 제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는 1975년에 쓴 양식비평 입문서 <당신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Jetzt verstehe ich die Bibel: Ein Sachbuch zur Formkritik>(분도출판사, 1977) 서두에서 ‘저 하늘에 하느님이 계셔?’라고 묻는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식비평과 문학비평은 우리에게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변화 때문에 요청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단지 복음서의 형식 분석만으로 다시금 과거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결국 이 완벽하고 멋진 글은 현대인이 복음서를 향해 던지는 많은 질문에 여전히 침묵한다.



연구범위를 정경으로 한정하는 방법론에도 문제가 있다. 예수의 목격자들은 아마도 파피아스가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 퍼져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어떤 목격자들은 교회의 지도자와 불화했을 것이고, 그들의 견해는 당연히 파피아스의 관심 밖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린 영지주의 복음서를 연구한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저작과 정경 복음서 안의 남성 지배구조를 파헤친 엘리자벳 쉬쓸러 피오렌자(Elizabeth S. Fiorenza)의 글에서 동일한 문제 제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보컴의 완벽한 세계 안에서는 그런 투쟁의 조짐이 감지되지 않는다.

 

결국 이 완벽하고 멋진 글은 현대인이 복음서를 향해 던지는 많은 질문에 여전히 침묵한다. 근대의 도전으로 나타난 여러 가지 주석 방법론들과 여성주의와 같은 해석학적 관점이 제기하는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에 침묵한 채, 과거의 믿음으로 회귀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보컴의 변증적 글쓰기에 아쉬움을 표하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복음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양식비평가들의 제안대로 물려받은 전승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시대의 요청에 대응하는 것이, 적어도 보컴의 한계를 극복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 한에서는, 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여정훈 / S모 신학대학원의 유령학생 

신약성서와 선교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