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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깨어나는 의미들을 보라







이 깨어나는 의미들을 보라


[서평] 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복 있는 사람, 2015)




글. Via Unit  _20150820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절차를 밟아 교회의 온전한 식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습니다. 함께 모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이고 항구적인 요소로 여겨지는 것은 이 네 가지 기본 행위입니다.(19)   


1.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누군가에게는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았던 한 남자의 생애에 불과할지 모른다. 좀 더 회의적인 이는 사실여부조차 불확실한 신화적인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역사의 한 지점을 산 그가 실상은 모든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며 어긋나 있는 이 세계에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었으며, 여전히 살아 숨쉬는 가운데 자신들과 함께 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존재, 그와 함께 한 이들의 증언, 그 증언에 바탕을 둔 사상과 실천을 자신의 ‘지금, 여기’로 끌어와 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를 변혁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지점을 두고 좌우로, 상하로 펼쳐진 시간, 생각, 역사 어느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실천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지금 여기에서 이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2.

물론 현실에서 그리스도교는 갈라져 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로, 서방교회는 다시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로, 개신교는 다시금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성공회, 감리교 등으로. 다른 교단을 이단시 하는 일도, 교단 내에서 여러 정치적, 교리적 문제들로 내분과 갈등이 일어나는 일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할 점은 그/그녀가 어떠한 교단, 교회에 속해 있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교리적으로 열려있든 완고하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성경 말씀을 듣고 읽으며 예배를 드리는 와중에 성찬례를 나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맥락, 특히 ‘보편 교회’보다는 각 교단, 교회의 ‘당파성’을 앞세워 분열을 반복해온 한국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가치는 우리 안에 늘 있었지만, 현실적 문제들 때문에 가려있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통 감각’을 일깨운다는 점에 있다. 『신뢰하는 삶』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적인 측면을 하나의 전체로 표현해냈듯, 로완 윌리엄스는 이 얇지만 단단한 책에서 세례, 성경, 성찬례, 기도라는 그리스도교의 형식적인 특징을 하나의 전체로 그려낸다. 이들 네 가지 실천 행위는 서로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삶을 이룬다.




3.       

인간은 모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어간다.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심연으로, 본래 모습 그대로의 인간성으로 초청되는 일이다. 세례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다시금 상기해 긴 망각의 역사가 만들어낸 혼돈과 곤경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 속에서 거듭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 내면에 자리한 혼돈은 질서로 변하며, “지배하려는” 인간성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인간성으로 변화한다. 변화한 인간성은 세례 받은 인간이 예수를 따르도록, "예수가 있는 자리"에 거하도록, 삶에서 예언자-제사장-왕으로서의 소명을 지니고 살도록 인도한다. 그렇기에 세례는 자신을 나머지 모든 인간과 분리해 그들 위에 서게 하는 어떤 특권적 행위일 수 없다. 세례를 통해 열리는 것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는 새로운 차원의 연대이다. 세례 받은 인간은 빈곤, 타락, 혼란이 가득한 내면을, 또 그러한 세상을 끌어안도록 요청받는다.


세례는 우리를 예수께서 가신 자리로 이끕니다. 그래서 세례는 우리를 어둡고 타락한 세상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또 그곳으로 초청받은 다른 사람들 곁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또 그곳으로 초청받은 사람들 곁에 가까이 서도록 이끕니다. 세례받은 삶은 궁핍한 사람과 연대하고 다른 모든 신앙인들과 함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35)

새로운 인간성(사실은 인간이 본래 지녀야 할 인간성)으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성경을 ‘들으며’ 지금 여기로 침투하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이 선 곳과 나아가야할 방향을 깨닫는다. 성경 ‘전체’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하나님 앞에 서기로 한 인간은 성서를 조각내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예수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움직임에 기대어 성서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조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어느 편에 서야할 지를 택해야 한다. 성경은 그저 “여기에 있는 이야기”가 아닌 “여기에 있는 ‘나의’ 이야기”, 더 나아가 ‘우리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여 듣는 인간에게 속삭인다. “여기 네 이야기가 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나아갈 바를 되새기는 인간은 함께 모인 가운데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그러니까 성찬례를 통해 예수가 역사의 시공간에서 행한 일을 부활한 삶으로 다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그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감사드릴 수 있다. 성찬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환대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환영한다. 떡과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인간은 모든 물질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 이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사물과 사람, 심지어 장소에까지 성례전적 심연이 깃들어있음을 체험하며 하느님의 눈으로 만물을 바라볼 수 있는 은사를 갖게 되는 것이다.




4.

이 세 가지 행위에 또 하나의 실천이, 이 세 가지를 감싸 안는 포괄적인 실천이 더해진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한다. 『신뢰하는 삶』이 ‘신뢰’에서 시작해 ‘신앙’으로 갈무리 되고 다양한 계기들로 시작된 여정이 ‘집’ 혹은 ‘본향’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듯,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이기 위한 모든 실천은 결국 기도로 수렴된다. ‘기도’는 세례와 동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실천이자 나머지 셋을 아우르는 최종적 실천이다. 세례, 성경, 성찬례의 바탕에는 늘 기도가 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의 성숙입니다. 기도가 자란다는 것은 단순히 삶의 한 부분에 효과가 있는 특별난 영적 기술을 손에 쥐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 4:13)”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중략) 간단히 말해 기도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이 무르익는 것입니다.(97)

협의의 차원에서 기도는 우리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이자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 자신도 함께 서는 것, 예수의 기도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 기도이다. 광의의 차원에서 기도는 회심에 이른 인간이 하느님에게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 안에 자리한 예수와 더불어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향해 성장해 가는 여정 전체를 아우른다. 세례와 함께 시작된 본래적 인간성으로의 복귀는 기도를 통해 무르익어 간다.




5.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현실 그리스도교계에서 로완 윌리엄스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활동한 서방 교회의 지도자다. 동시에 그는 동방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적으로 수도원 전통과 동방 교회 전통에 애정을 표출하며 개신교 종교개혁의 성과를 간과하지 않는 교회 일치적인 신학자다.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를 반대하든 호의적이든 간에) 신학 또한 세부 전공으로 전문화 되어가는 와중에 전공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목회적 실천과 신학적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드문 신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개념을 거슬러 은유와 비유를 말하며, 화석화된 교리를 거슬러 삶에 들어오는 의미를 말한다.


로완 윌리엄스의 글이 낯설다면 이는 그가 비단 한국 개신교에서 존 스토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미로슬라브 볼프, C.S.루이스 등의 인기와 인지도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성공회 소속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이렇게 보면 다른 성공회 학자나 목회자가 별다른 낯설음 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읽힌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갈라져 있는 교회의 현실을 마주하는 가운데도 ‘보편 교회’를 지향하는 모습, 현실의 비극성을 도외시 하지 않으면서도 그 밑자리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지 않는 안목, 결국 모든 것이 평화와 찬미로 귀결될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견결한 믿음, 다른 누군가의 신학과 신앙을 짓밟지 않고 신앙의 동역자들과 호흡을 맞춰 ‘더불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려는 태도, 한국 교회에 낯선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모습들이다. 그 ‘낯섦’이 지시하는 것이 바로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공통분모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하나의 시도이자, 하나의 제안이자, 하나의 증언이다. 이 증언을 매개로 무엇을 다시금 되새기고, 다시금 돌이키며, 무엇을 변화시켜 나갈지는 오롯이 읽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Via Unit / 읽고, 쓰고, 번역하는 신학생들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