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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삶, 기독교 신앙의 기초







신뢰하는 삶, 기독교 신앙의 기초


[서평] 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김병준․민경찬 옮김, 비아, 2015)




글. 설요한  _20150820





(※ 이 글에서는 하나님과 하느님, 성경과 성서, 기독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단어를 혼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성경’,'기독교'라는 표현이 익숙해 대개의 경우 이 표현을 썼습니다. 하지만 『신뢰하는 삶』을 직접 인용할 때는 ‘하느님’,‘성서’,'그리스도교'를 썼습니다.)



기본(基本)?

 

‘생각의 양식으로 삼을 만한 책들을 많이 읽었어야 했는데...’


가끔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특히 철학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 말이다. 이런 표현들을 소화할 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고 느낀다. 자주 쓰이는 철학적 표현들은 그만큼 그 의미들이 고민되어 온 역사가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하는 것, 즉 기본기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기를 갖추어야 나도 어떠한 글들을 읽어나갈 때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고민해 온 내용의 연장선에서 나의 생각을 전개할 수 있다.


가령 ‘인정’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고 싶어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현재‧문성훈 옮김, 사월의 책)을 편다고 하자. 당장 1부 1장의 제목이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 : 근대 사회철학의 토대”다. 자기보존과 근대를 이야기하는 논의를 읽고 있으면 텍스트를 전개해 나가는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고·중세와 근대의 인간관의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좀 더 나아가면 ‘인간은 무엇이고 어떠한지’부터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할 기본기가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어떨까. 몇 년간 인터넷과 책 등을 통해 각종 신학적 지식과 교파에 관한 정보들을 모으고 때로는 이런저런 논의의 장에도 발을 들여 보면서 기독교 신학에 다양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역사 속에서 치열한 논의 끝에 교회 분리에 이르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 악의 문제, 기독교 구원의 본질과 과정, 교회의 정의과 형태, 교회와 정치체제의 관계, 그리스도인의 정치·사회관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은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같이 고민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묶는다고 했을 때, 내면에 지닌 공통된 의식이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일텐데.


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비아,2015)



기독교 신앙의 기본, 신뢰의 증표로서의 신앙고백


『신뢰하는 삶』은 전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가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를 해설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다. 신경(혹은 신조)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온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여 공동으로 고백한 신앙의 내용을 집약해 놓은 것이다. 로완은 신경을 해설하면서, 고백이 함의하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설명한다. 물론 로완이 설명하는 기본은 흔히 ‘기본적’이라는 표현에 담긴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는 않다.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의 어려움, 모호함 가운데 로완은 ‘신뢰’를 말한다. 이 책의 원제는 Tokens of Trust다. 토큰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일종의 증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커뮤니언 토큰(communion token)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 사목의 대상으로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증표를 의미했고, 사람들은 이 토큰을 제시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즉 이 책에서는 사도신경와 니케아 신조가 기독교 신앙의 토큰, 곧 신뢰의 증표가 되는 것이다.


서문에서 로완은 기독교 신앙을 “진정으로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에 관한 앎”으로 정의한다(17쪽). 그리고 기독교는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탐구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덧붙인다(17쪽). 로완에게 있어 신앙고백이나 신조는 “기독교 사상과 생각, 행위, 기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17쪽).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포괄하는 모든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어디서 나의 근본, 본향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언의 출발”이다(25쪽). 존재의 이유를 묻는 이 질문에 대해서 로완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답한다. 성경, 특별히 에베소서를 통해 로완은 하나님은 “평화와 찬미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화해를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설명한다(28쪽).


1840년도의 communion token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로완은 하나님을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것과 같은 층위에 놓일 수 있는 실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그분의 무조건적인 호의 때문이라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여 주신 사랑... 그것은 완전히, 어떤 제약도 없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은밀한 방식으로 얻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33쪽)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무조건적일 수 있고 제약 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러면서도 자신을 위해 은밀한 방식으로 얻는 것이 없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스스로 충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호의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 주위의 것, 우리가 인식하는 수많은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규정된다. 우리는 스스로 있을 수 없기에 어떠한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면서 안정을 찾으려 한다. 스스로 충분하지 않기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줄 수 없다. 또한 그러하기에 각자의 은밀한 것들이 있다. 자발적인 호의가 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다.


물론 이런 이해를 하기 이전에 “완전한 신뢰의 대상의 존재” 자체를 물을 수 있다. 굳이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 한계에 대한 자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한계 앞에서 고뇌 혹은 절망하거나, 아니면 한계 자체를 인정하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평안을 찾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로완은 그의 다른 책,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김기철 옮김, 복 있는 사람)에서 우리의 하나님 인식의 한계와 선종 불교의 깨달음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를 언급하며 기도에 대해 설명하는 와중에 그는, “우리의 여행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심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선종 불교 신도들이 오랜 시간 역설이나 난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다가 마침내 그들로서는 결코 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라고 말한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112쪽).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깨닫는 것과,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독교의 고유한 내용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물론 기독교는 ‘신’을 믿는 종교라는 점에서 불교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은 어떤 신일까. 신 존재에 대한 물음마저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와, 로완은 이 책에서 “만물의 창조주인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바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바는 최대한 긴밀히 연결되어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한다. 즉, 창조와 구원을 연결한다.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36쪽)이라고 말한다. 창조가 있고, 이 창조에는 어떤 목적이 있고(그 목적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깨어진 이 세상 속에서 그 목적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확신하고, 그분께 귀의한다”고 한다(36쪽). 로완은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펴지는 않는다. 성경은 논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3쪽). 하지만 분명 성경은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갈등을 빚는 순간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분노,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회의, 하느님의 존재를 실제로 느낄 수 없을 때 겪는 인간의 고통과 상실의 순간”이다(43쪽).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으며(44쪽), 이는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책임을 지는 것이며(46쪽),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러한 길을 걷고 있다(47-50쪽). 로완에게 있어 기독교의 믿음은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 사는 것, 그들과 같은 것을 아는 것, 그들이 마시는 물을 함께 마시는 것이다(52쪽). 즉, 신뢰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로완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과거 신학자 페일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시계공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은 초월하는 분이다. 즉, 범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도 아니다(여기까지가 2장 전반부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만드시고 계속해서 관여하시는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악의 문제에 관한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답하기 어렵다. 로완 역시 이 점을 자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시는 분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이 활동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72쪽). 로완은 하나님을 애써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신 그 하나님이 우주에 개입하실 때 우리에게는 책임이 따른다고 설명한다. 이 책임을 맡은 각 그리스도인은 그저 삶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 줄 뿐이다. 성경은 애써 논증하지 않고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애써 논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 준다고 했는데, 특별히 성경의 하이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다. 로완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표현을 통해 “예수에 관한 증언의 강조점은 그가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있지 않고 그가 ‘무엇을 했느냐’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짚어 낸다(93쪽). 예수를 하나님의 연주자로 비유하는 가운데(107-109쪽), 로완은 예수를 “그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옮겨서 드러내는 권능을 지닌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살아 있는 하나의 실재, 하나의 중개자”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정말로 자신을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골 2:6-7), 우리 가운데 오시고, 계속해서 행하시는 분이다.


로완은 계속해서 본향의 평화와 찬미를 말한다. 본향, 평화, 찬미라는 말들은 이 말들이 나타날 수 있는 어떠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원죄’와 그 결과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은 돌아가지 못한 상태가 있다는 것, 평화는 평화롭지 못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로완은 원죄를 설명하면서, 죄 자체의 무거움이나 무서움을 통해 인간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로완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호의를 베푸시는 분으로,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하시는 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로완은 어두움을 깊이 인식하고 있지만, 원죄를 설명하면서 어두움에만 천착하기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이 돌아가야 할 바를 지향하고 있다. “원죄를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우리의 삶과 생명, 기쁨을 가로막는 것들을 배우는 과정이 함께 섞여 있음을 들여다 봅니다”(119쪽). 신뢰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가운데 있는 어두움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로완은 이 “인류의 뒤틀림”(118쪽)을 “견고한 자기 자신의 감옥”(119쪽)이라고도 말한다.


Enrique Simonet, <Flevit super illam>


이 원죄의 모든 결과인, 우리가 지은 죄의 짐을 바로 예수께서 짊어졌다. 이를 희생, 지불 등의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로완은 “이 이미지들이 말하는 단 하나의 핵심은 우리가 평화에 이르기 위하여 예수가 생명을 포기해야 했다는 확신”(125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평화의 대가는 “성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완수되었고”(127쪽), 이어지는 부활과 일련의 사건 전체를 통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129쪽).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고 올라가셨고, 이제 성령을 통해 “예수의 숨결을 자신들 안에 이어받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우정과 교제를 지속하는 가운데 활동”하신다(132쪽).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꺼이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늘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살아간다(138쪽). 흔히 말하는 ‘이미, 하지만 아직’이다.


이제,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다. 성경 그리고 공동체. 성경을 통해 진리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이 진리는 공동체 가운데서 깨닫고 배운다(141쪽). 이 공동체는 교제, 그리스어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데 이는 서로의 것을 나누고, 공통된 것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142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일어나는 상태가 바로 ‘평화’다(144쪽).



성령을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회, 즉 교회는 믿음의 대상일까. 교회사에는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할 일들이 여럿 있었다. 이 일들 가운데 많은 경우는 평화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다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벌어졌다. 로완은 “교회에 속한 삶의 모토는 ‘타자와 함께’”라고 강조한다(148쪽). 그러면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말하고 있다. “교회의 다양성은 성령이 선사하는 다양한 은총의 선물들, 각자가 맺는 하느님과의 다양한 관계, 그것에서 비롯하는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관점, 하느님의 역사를 이 세계에서 이루어 나가는 각 사람의 다양한 방식을 가리킵니다”(149-150쪽). 이러한 존중은 목회자(사목자)와 교인(대중)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보통의 경우는 가르침받는 사람이 가르침의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복속되는 경우가 많지만, 로완은 사제와 사목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의지하는, 공동체의 삶이 지닌 뚜렷한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51쪽).


즉, 바른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가 지닌 은총의 선물을 함께 나누고 격려한다”(151쪽). 물론 이것은 서로가 지닌 어떤 것이든 무조건 용인하자는 뉘앙스가 결코 아니다(모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마치 ‘상대주의’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창조론보다 죄론을 부각하는 습성을 지닌 곳에서 나타내는 기우에 가깝다). 로완의 접근은 은사의 남용보다는 그러한 우려를 넘어 은사 자체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며 공동체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사람이 저마다 고유한 은총의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와 똑같이 각 사람에게는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유한 결핍이 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152쪽).


이런 공동체, 예수로부터 부름받은 공동체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현장은 성찬의 자리다. 성찬은 예수와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눌 수 있는 자리다. “신앙인은 빵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예수의 몸과 피가 담고 있는 것, 성자 하느님의 눈부신 활동과 권능, 예수를 예수이게끔 하는 그의 생명을 받습니다”(161쪽). 이 성찬의 자리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모두가 초대받을 자격이 없었다. 모두가 동등하게 부르심을 받았다. 모두가 사랑과 용서의 수혜자다. 누구 할 것 없이 예수의 기도를 따라 기도하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피조물 사이에는 평화가 이루어진다. 그 식사의 자리에 함께 있다면, 누구건 간에(모르건, 좋아하건, 증오하건) 나와 함께 초청받은 귀한 손님이다. 내가 영광의 그날에 미리 참여하고 있다면, 그 역시 함께 참여하고 있다(165-166쪽).


공동체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한 성경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경이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성경 읽기는 교회에서 함께 하는 교회의 관습이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독점으로 나타나 성경을 오용해서 나타난 폐단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폐단이 교회에 성경이 주어진 목적을 비틀 수는 없었다. “성서는 공적인 문서이자 교회의 삶의 규범”이었다(169쪽). “종교개혁은 성서를 교회의 중심에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였지 사적인 독자들의 손에 쥐어주려는 시도가 아니었다”(169쪽). 성경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경전이자, 각자에게는 “당신에 관한 말”로 다가온다(172쪽).


그렇다면 교회는 성찬을 행하고 함께 성경을 읽는 곳이라고 보면 될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말과 행위로 드러난 것 깊숙이 있는 본질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숨을 받은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175쪽). 로완은 여기서 세 가지 사례를 든다. 부채 탕감을 위한 ‘주빌리 2000’ 캠페인 시위 속에서의 다양한 그리스도인, 쇠락한 지역에서 공적 사역을 하며 사역하는 한 성직자의 사역 공간, 섬사람 사이의 갈등이 극심한 솔로몬제도에서 목숨을 걸고 사역하는 멜라네시아 형제회(177-180쪽). 특별히 세 번째 사례에서 로완은 “교회가 지닌 능력은 사적인 이익에 대한 관심 없이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평등과 당파성을 배제한 사랑을 반영하는 공동체로 나타나고 또 나타내야 한다”고 말한다(179-180쪽). 로완은 교회의 성사(성례)에 참여할 때에도, 교회에서 성경을 꾸준히 들을 때에도 교회를 볼 뿐만 아니라(이 둘은 돌아가야 할 바를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실제로 힘을 부여한다), 섬김의 삶을 통해서도 교회를 본다.


다시 신뢰의 문제로 돌아가, 로완은 이런 신뢰의 개인적인 실천으로 기도를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 아버지’를 고백하며 “예수의 말을 입술에 담아 존재의 깊은 곳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하느님께 나아오는” 순간이 ‘나는 믿습니다’를 이해하는 순간이다(215쪽). 이것은 로완이 신경에 대한 강연을 하고 9년이 지나 2014년에 다시 강연을 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도를 다룬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일에 우선해서 예수의 기도가 그들 자신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98쪽). “다시 말해, 기도란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서 기도하도록 맡기는 것이요,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상과 희망을 점차 그분의 영원한 사역에 일치시켜 가는 길고도 때로는 힘겨운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99쪽).


로완에게는 신앙을 가지고 정치․사회적인 사안을 다루는 것과 개인 경건을 다루는 것 사이에 갈등이 없다. 하나님은 충분한 분이시고 또한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을 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환대하셨듯 우리의 이웃을 환대한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한 이웃을 향해 나아간다(그를 나에게로 받아들인다).


Rowan Williams / Wikicommons media 

*원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40563877@N00/461805758 - BriYYZ, Archibishop of Canterbury 



기본을 딛고 있는, 거인의 어깨에서


이 책을 다 읽고, ‘신학을 배운다면 이런 사람에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완이 말하고 있는 각 내용들이 얼핏 보면 특별하거나 색다른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스윽 읽고 지나가면서 ‘당연히 맞는 말이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내가 상대적으로 친숙한 영미권 중심(특히 미국)의 개혁신학 전통에서도 로완이 말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나 초월성은 외려 이쪽 전통에서 강력하게 설명하고 논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로완을 읽으며 받았던 인상은,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도 이 둘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고민들을 깊고 넓게 이해하고 있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신뢰를 말하고 있으며, 땅과 하늘을 잘 연결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로완은 비극 속에 나타난 인간의 고뇌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매우 추상적이거나 현학적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하늘에 닿아 있고 발은 땅에 닿아 있기에 매우 실제적으로 들렸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기독교회사 가운데서 계속해서 고민해 왔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그도 계속해서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는 땅의 문제에 천착할 때에는 하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고, 하늘에 시선을 둘 때에는 땅에서 발을 떼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내가 그렇다). 좋은 의미로, 그는 하나님에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호의의 시선, 사랑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완의 고향은 스완지인데, 스완지는 비트겐슈타인과 문학으로 유명한 도시라고 한다. 그리고 로완은 특별히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로완 윌리엄스의 배경에 대한 일련의 내용은 8월 10-11일에 있었던 현대기독연구원에서 김진혁 교수가 했던 ‘로완 윌리엄스 강연’을 통해 배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내용은 “단어, 개념은 그것이 놓이는 실천의 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타자를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도 나온다. 그리스도인의 활동이나 교회의 활동 곧 세례, 성찬, 성경 읽기, 기도는 제한적일 수 없다. 신조는 우리의 토큰이긴 하지만, 이 토큰의 생김새나 토큰에 써있는 문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손에 이렇게 생긴 토큰이 쥐어지게 된 경위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백이 그분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이렇게 보면 신조 내용의 많고 적음, 자세함의 정도보다 비록 짧더라도 각 고백이 얼마나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해진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왜 1-4세기의 신조, 교부, 공의회의 문서에서 신앙의 원천을 길어내려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실은 ‘신조라는 것은 단순히 서구 사상의 산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는데, 신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라면, 곧 신조 자체가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신조 언어의 심층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이 낳는 실천까지 다다르게 된다면 이 신조는 서구 이상의 보편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이 책에 대한 웬만한 설명을 보는 것보다는 바로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각 내용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고, 사유의 흔적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로완의 깊이만큼 생각하지 못하는 이 글이 책의 맛을 반감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의 상황 속에서 나오는 언어와 나의 상황 속에서 나오는 언어가 다른데, 문학, 철학, 신학, 사목을 두루 경험한 원숙한 신학자와 인생 경험도 일천하고 고민의 깊이도 얕은 한 명의 직장인의 차이는 명백하다(아니면, ‘옮긴이의 말’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로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정갈한 언어로 담아 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그를 만나고, 그의 목소리가 가리키는 바, 도달할 수 없지만 이미 인생 깊숙이 와서 우리를 품고 계신 분을 고민할 수 있다면, 반가울 것이다.




그렇다고 ‘아, 이 사람 참 대단한 것 같은데’ 하며 감탄만 할 여유는 없다. 이제 남겨진 것은,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서 내 삶의 지평을 둘러보는 일이다. 그리고 시선의 높이는 유지한 채로, 다시 내 어둠의 땅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긴장을 풀고 우리 손을 하느님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활짝 열어놓습니다. 어떠한 환상도 없이, 투사하는 일도 없이, 또렷한 의식 속에서 자유롭게, 우리는 우리를 따뜻이 맞이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214-215쪽)







설요한 /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신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과 미래 걱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독교 읽기’를 취미로 삼아 버렸다.
실은 이런저런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생각과 실천의 이원론자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