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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청춘은

'광장, 청춘'을 시작합니다.



지난 9월 30일에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합의 소식에 많은 언론들은 일제히 [속보]를 외쳤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은 속보를 전하는 기사의 타이틀에 ‘극적’, ‘전격’이라는 표현을 남발했습니다.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함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극적 타결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의 미세한 피리소리에도 금새 장단을 맞추는 언론의 보도 행태는 이 날도 어김 없었습니다. 


언론의 이런 모습에 대해 최근 <뉴스의 시대>를 출간한 알랭 드 보통이 하는 지적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잠재적 기삿거리에 맞닥뜨리면, 언론은 지금 국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이 되는 것을 골라내기 마련이다. 특정 시점에 국가가 (자신의 약점을 벌충하기 위해) 가장 귀기울일 필요가 있는게 무언지가 뉴스 기사 목록 막후의 선정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의 언론에 낯선 게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 <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53쪽 


알랭 드 보통은 범람하는 뉴스와 정보의 막대한 양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뉴스를 전하고, 받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다지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문맹률이 99%나 다름없던 중세 봉건 시대에나 보일 법한 권력의 패악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수 많은 뉴스를 접하는 현대 시대에도 그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들끓고 있는데 저들은 태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또 하나의 웹진을 보탠다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저도 같이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고민의 범주를 기독교 세계로 조금 좁혀봐도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독교의 뉴스들 중 더 끔찍한 것이 많습니다. 복음주의 안에도 이미 건강한 언론과 미디어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광장, 청춘>도 아마 작은 것 하나 못 바꾸고 말 것입니다. 이 무기력함의 대열에 서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실패의 한 걸음을 내딛고 만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읽고 쓰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툭하면 ‘위기’를 말하고 ‘종말’을 고하는데, 그는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문맹률이 95% 정도로 추정되는 19세기 중반의 러시아에 어떤 작가가 등장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리가 1842년에 『죽은 혼 Mertnye Dushi』을 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를,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를 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뭘까요, 이 사람들은. 어이가 없지요.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걸 연달아 쓸 수 있었을까요?”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지음 / 자음과모음 펴냄 / 273쪽 


유독 교회안에는 뉴스도, 책도, 다 관심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우리는 이래저래 또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30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는 제 1야당도 무기력을 호소하는 때에 깝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시대가 우리에게 윽박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냥 널부러져 있을 순 없습니다. 써봤자 읽을 사람도 얼마 없었던 저 역사의 어둠속에도 문학가들은 당당히 빛을 발했습니다. 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장, 청춘>도 무언가를 쓸 것입니다. 계속 쓸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것처럼, 쓰는 것이 바로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이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근거를 명시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10쪽


<광장, 청춘>은 사실 가제입니다. 웹진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화두가 바로 ‘광장’과 ‘청춘’이었기에 아예 타이틀에도 그대로 앉혔을 뿐입니다. 공적인 신앙을 가다듬지 못하고 몸집만 비대해진 한국 교회가 광장의 신학과 언어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동기입니다. 이에 주체가 되는 글쟁이들은 기존의 명망가 위주로 채우지는 않으려 합니다. 잠잠히 실력을 벼르고 있는 숨은 고수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필자들을 많이 모시려고 합니다. 심도있지만 난해하지 않고, 대중적이지만 깊이가 있는, 진지하지만 자유롭고 유쾌한 글들이 <광장, 청춘>이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일일까요? 사실 준비하는 우리도 앞으로 이 웹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계산하지 않고 가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믿음이라면 일종의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곳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벗님들이라 생각합니다. 시작하는 <광장, 청춘>에 벗님들이 뜨거운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희 속으로.”[각주:1]





송지훈 / 성서한국 사무국 간사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1.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303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