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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4.16과 6.11 그리고 국가의 맨얼굴


습관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다. 권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

 

『팡세』

 

“꿈에서도 막 싸웁니더. 일이 손에 안 잡힙니더. 갔다 오면 사람 몸만 피곤하고. 동네가 얼마나 좋습니까. 공기도 좋고. 예전에는 정부에서 하는 일은 다 잘해주겠지 생각했는데, 진짜로 송전탑 문제 경험 안 했으면 몰랐지예.”

 

『밀양을 산다』


2014년 4월과 6월. 세월호가 ‘침몰’했고 밀양은 ‘침탈’당했다.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들과 밀양의 할매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국가의 권위를 뒷받침하던 신비한 토대, 즉 ‘국가에 대한 믿음’이라는 오래된 습관을 몸에서 지워내고 있다. [각주:1]자신들이 믿던 모습과 전혀 다른 국가를 보며 그들은 국가 권위의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간 것이다. 권위의 끝자락에서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4.16과 6.11 이후 한국사회가 던지고 있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은 답변이자 질문 이후의 고민거리들에 대한 하나의 소묘이다.




1. 떠도는 두 개의 감정 그리고 하나의 질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아직도 10명의 희생자들이 구조되지 못한 지금, 두 개의 감정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첫번째 감정은 슬픔이다. 희생자와 그들의 유가족,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국민 전체의 슬픔이 되어 애도하는 마음들이 모여지고 있다. “어른으로서 미안합니다.”라는 문구는 현재 한국사회의 ‘감정의 구조’를 표상한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건 분명 진심어린 슬픔의 또 다른 표현이다.


두번째 감정은 분노다. 김영오씨의 46일 간의 단식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지 않고 있는 박근혜정부와 여·야당에 대한 분노가 높아져가고 있다.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 연행에도 불구하고 각 시·도의 광장에 모여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개의 감정은 한 대 섞여 현재 한국 사회의 ‘감정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장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섣부른 답변을 내놓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질문의 중의성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땐 2가지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1.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혹은 2.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과 밀양의 할매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국민들이 던진 질문은 합리적 이성을 담지 한 기구인 국가에 대한 실망과 그로인해 터져 나온 것으로서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자칫 중립적일 수 있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질문의 주체들의 의도에 가깝게 다음과 같이 바꿔보고자 하다. “국가의 맨얼굴은 무엇인가?”



2. 국가의 맨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삶을 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한번쯤 국가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건 계급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경우이거나 계급적으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국가가 맨 얼굴을 드러낸 현장들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경우일 확률이 높다. 위의 경우들에 속한 이들에게 국가는 화장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설령 맨얼굴을 보여도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전자의 경우는 확실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의 경우들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맨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매우 ‘결’이 다른 문제다. 이는 국가가 최근 6.11행정대집행에서 쇠사슬을 목에 걸고 삶의 자리를 지켜내던 밀양의 할매들과 4.16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어 슬픔에 잠긴 희생자 가족과 그들의 편에 서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시민들에게 보인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국가는 누군가-그것이 심지어 국민이라 할지라도-국가에 반하는, 아니 참사 직후 세월호 학부모들의 ‘비폭력 행진’과 같은 ‘궁금증’이라도 보이면 그 맨얼굴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주권자가 스스로 위기라고 ‘결정’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국가의 행동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 중 하나다.[각주:2] 그가 그의 짧은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한 대로 국가의 맨얼굴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폭력이 어찌 합법적일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이 ‘아이러니’까지 독점하여 합법과 불법 그 사이 혹은 법에 대해 외부적 위상이라는 ‘공간을 확정’하고 화장한 얼굴, 즉 합법적 외향을 지닌 채 ‘불법적 폭력’을 감행한다. 슈미트의 말처럼 주권은 법을 창출하기 위해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권은 법적・정치적 질서가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를 창출·확정하고 정의한다.


이와 함께 국가의 맨얼굴에는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주지하듯이 “직접 죽이지는 않더라도 죽게 내버려두는 것 혹은 죽음의 상황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 역시 포함 된다.[각주:3] 국가의 맨얼굴이 항상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폭력으로만 표상될 것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로 ‘허위의식’이다. 벤야민이 간파했듯이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비상상태가 ‘규칙’이라는 것을 말해주지만 비상상태 혹은 국가의 폭력이 작동되는 방식은 절대 ‘규칙’적이지 않다.



3. 국가의 맨얼굴 앞에 우리는? 무엇을?


앞으로도 국가는 역사 속에서 자신이 생존해왔던 습성에 따라 4.16참사 희생자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할매들의 삶의 자리를 빼앗았던” 자신의 맨얼굴을 가리기 위해 화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6.11의 밀양할매들과 4.16참사 희생자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얼굴을 가리키며 “여기 국가의 맨얼굴이 있다!”고 외치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본 사람, 즉 국가의 맨얼굴을 담고 있는 이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국가의 맨얼굴을 보고 담은 이의 초상은 밀양의 할매들과 광화문의 유민이 아버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희생을 통해 던져준 “국가의 맨얼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광장·공론장안에는 국가의 맨얼굴에 대한 질문이 존재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매우 회의적이다. 근대적 의미로서의 국민국가를 마주한 순간부터 한국전쟁을 전·후한 국민국가형성의 시대, 87년 이전 군사독재의 시대, 97년 신자유주의체제를 넘어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민주주의의 후퇴’와 ‘유사파시즘’ 시기인 지금까지. 이 질문은 다양한 ‘통치전략’에 의해 금기 되었고 질문의 금기는 결국 이 질문을 던진 이들에 대한 금기로 이어졌다. 질문과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죽이는 사회는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 서서히 질문을 죽이던 ‘질문 이전의 사회’가 무너지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질문 이후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국가가 맨얼굴의 외연을 좁히기는커녕 오히려 넓혀가고 있고 그로 인해 통치의 정당성과 동의적 기반이 취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이후의 사회’에서 4.16참사와 6.11 밀양 행정대집행이 갖는 위상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과 ‘할매’는 그동안 국가가 국가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한 국가인종주의전략으로서의 ‘빨갱이담론’과 그것의 고급스러운 변 형태인 ‘종북담론’ 중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작고 약한 ‘이웃’의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인종주의가 성립하기 어려운 국가의 ‘맨얼굴적 행위’는 ‘질문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이 ‘질문 이후의 사회’가 도래를 넘어 이 땅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국가의 맨얼굴에 대한 질문의 양과 질이 다양해져야 한다. 거시적으로는 국가보안법과 군사비에서부터 미시적으로는 우리 삶의 곳곳에 습관화되어 있는 국가의 맨얼굴까지 전 방위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것이 폭력인 국가가 더 이상 자신의 맨얼굴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시작이며 그에 따른 무고한 희생을 막는 길이다. 





박경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겨자씨를 심는 농부를 꿈꾸는 그는 

성공회대에서 인종주의 및 소수자와 관련된 연구로 사회학 박사과정 중에 있고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도시형대안학교인 '꿈꾸는아이들의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배우며 또 가르치며 배움을 키워나가고 있다.



  1. 이와 관련하여 최근 서울·경기·인천 고2 학생 1051명을 대상으로 의식 조사가 있었다. 조사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눠 학생들의 생각을 각각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다” 참사 전 61.9% → 참사 이후 24.9%, “내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 46.8% → 7.7%, “부정부패가 철저히 감시되고 사라지고 있다는 믿음이 든다” 6%, “사회지도층이 리더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믿는다” 6.8%. [세월호 세대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 7.7%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2076.html [본문으로]
  2. 이후 그의 연구는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틸리(1929 ~ 2008)에 의해 더 구체화 된다. 찰스틸리는 베버의 정의를 전유해 유럽의 국민국가 형성을 폭력과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연구한바 있다. [본문으로]
  3. 민간 사설폭력기관의 폭력을 방관하는 모습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