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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빼앗긴 ‘광장’을 위한 애도


“공간은 점점 더 정합적인 방식으로 주권의 시나리오 속에 병합되고, 

각각의 특수성은 점차 불가항력적으로 총체에 의해 구조화된다.” 

안토니오 네그리 



분노를 넘어선 수치심

계절에 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곳곳에 심겨져 있고, 골목마다 개성 넘치는 카페와 상점을 볼 수 있으며,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 예술인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 뜨거운 햇살 아래 바닥에서는 시원하게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그 안에서 속옷만 입은 채 마냥 즐겁게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곳, 한 쪽 구석 벤치에서는 연인들이 닭살 돋는 애정행각을 하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다른 한 쪽에서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손수 정성스럽게 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러 잠시 담배를 피우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가끔씩 이순신과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볼 수 있는 곳, 우리가 알고 있는 ‘광장’의 모습이다. 그런데 얼마 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보고 난 후 이런 광장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지면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인내력의 뇌관이 폭발하고 말았다. 동시에 너무나 부끄럽고 쪽 팔렸다.


            Ⓒ 트위터.                                                                                Ⓒ 오마이뉴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 중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나?’하는 당혹감이었다. 한마디로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가적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은 배 하나는 잘 만들고, 통신기술도 뛰어나며, 나름 발 빠른 재난대비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수치스러운 거다. 눈앞에서 아이들이 수장 당하는 모습을 전국민이 생중계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자체가 모두에게 깊은 무력감과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나에게 그런 수치심에 정점을 찍어 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저기에 왜 경찰들이 자리를 독점하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서있는 건가? 그리고 여경은 왜 백주대낮에 광장 한 복판에서 시민의 이동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건가?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 분노를 넘어선 수치심이다. 



광장: 시민들의 자존심

근대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광장에서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을 나누면서 공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교환하고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 내면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담론들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장소, 즉 모든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의 탄생이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토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공간을 ‘공론장’(public sphere)이라 불렀고, 공론장의 발생과 특징을 추적하면서 합리적 의사소통의 근거와 토대를 밝혀냈다.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는 바로 ‘공개성’(open)과 ‘접근가능성’(accessibility)인데, 이는 정보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권력의 감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공론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시민들의 공론장은 화폐와 행정권력으로 상징되는 근대국가의 권력장치에 맞서 사회통합의 연대력을 형성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생활세계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광장’은 말 그대로 모두에게 열려진 장소이다. 따라서 모두의 장소가 되어야 할 광장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혹은 단체가 독점해서 점유할 수 없다. 그만큼 ‘광장’은 고대 그리스 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독특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여기만큼은 우리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보존해야 할 공간이라는 시민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는 우리가 그동안 시민들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공원과 광장에서의 모임과 결사를 간섭하고 더 나아가 생활과 거주의 공간까지 침입해 들어와서는 자신의 주권을 확장시키고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에 시민들을 순응시키고 위해 공간을 자꾸만 구조화하고 점유하려 한다. 어쩌면 아렌트의 말처럼 공화국의 위기는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간섭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목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외침

오늘날 한국에서 회자되고 있는 굵직한 사회적 담론들과 이슈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공간에 대한 이념투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용산화재 참사와 제주 강정마을, 밀양송전탑 투쟁과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경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들은 공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정욕구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시민의 공간을 빼앗으려는 공권력과 이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보전하려는 투쟁 이면에는 사적인 영역을 계속 압박하면서 시민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감시하려는 국가 폭력이 숨겨져 있으며, 동시에 개인의 필요와 목소리가 공적인 영역에서 전혀 발화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를 배제하려는 무시의 동학이 작동하고 있다. 지금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은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한 맺힌 절규이자 외침이다. 


            Ⓒ 민중의소리.                                                                                   Ⓒ 미디어충청


물론 개개인들의 욕구가 모두 법정적인 언어로 번역이 된다든가, 합리적인 언어로 해소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목소리들이 하나의 권리가 되어 공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되고 수용된다면 기존의 공론장에서 배제를 경험한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정당한 분배라든가 공정한 정의의 원칙에 의한 법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가 대중들에게 승인되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목소리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광장으로

따라서 공론장은 다양한 상황 가운데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중요한 정치적 가치는 바로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즉, 공론장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며, 사회가 만들어 낸 은밀한 배제의 구조로부터 밀려난 자들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이토는 외부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과 필요에 저항하고 사회적 편견과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다시 설정하고, 다시 해석하는 것이 바로 대항적 공론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공공신학의 역할과 과제는 다름 아닌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시켜 주고 이들을 위한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적인 자리를 만들어 주고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주는 것, 그리고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 이런 작은 행동과 몸짓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신학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빼앗긴 우리의 광장을 되찾기 위해 바쁜 일상의 한 토막을 쪼개 광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수다를 떨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작지만 가장 위대한 제자도일 것이다. 




*참고한 글

안또니오 네그리, “정치적 공간의 위기,” 워너 본펠드 엮음, 『탈정치의 정치학: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 갈무리, 2014.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류수연, 윤미란, 윤대석 옮김, 이음, 2009.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옮김, 나남, 2001. 





최경환 / 남아공에서 공공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