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개역개정)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로마서를 읽다보면 1장에서 유독 뜨겁게 달궈진 구절이 보인다. 바로 1장 17절의 구절이다. 제국의 압제 속에서 꾸역꾸역 자신들의 종교적/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해가던 유대인, 그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 로마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함축된 의미를 되살려서 풀어 적자면 ‘드디어 하나님이 온 세계의 왕이 되셨다!’정도가 아닐까?
도대체 바울의 뜨거운 감정이, 그리고 그 이면에 함축된 절절한 기다림이 함축된 외침. 이 복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왕이 되셨기에, 그리고 그렇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은 무엇이기에, 바울은 단호하게 ‘드디어 하나님이 온 세계의 왕이 되셨다!’라고 선언하고 있을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러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자 예수님이 왕이 되신 방법에 대한 내용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해 설명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악인이 창궐하는 중에,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은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지신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이 본문은 단순히 ‘조금만 기다려, 의인은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여.’와 같은 의미에서 머물지 않는다. 핸슨(A. T. Hanson)이 지적하듯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을 메시아 예수를 지칭하는 단어로써 사용한다.
메시아 예수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바로 악인이 창궐하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온갖 제국의 세력이 민중을 압제하고, 온갖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가 민중의 자발적 사유마저 유린하는 이 세속에서, 바로 메시아 예수가 ‘믿음’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선고된 사망의 권세마저 이기고 말이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 나라’가 잉태된다. 마치 겨자씨처럼.
여기서의 ‘믿음’에는 ‘상호 신실성’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인간 예수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졌던 의무에 대한 신실함, 즉 이웃을 사랑하고, 잘못된 체제의 억압에 반대함으로,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신실함의 의미가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망을 향해 ‘신실함’만으로 달려갔던 예수를 사망으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신실함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 신실성’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바울의 외침을 뚜렷이 직면한다. ‘드디어 하나님이 온 세계의 왕이 되셨다!’라는.
그 나라의 백성은 왕께 대하여 복종할 뿐이다.
메시아 예수는 모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대표자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개시(開始)한 시초이다. 그는 단순히 개인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부름 받을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신실함을 살아냈다. 이 말은 곧 메시아 예수가 반역자로 모함 받아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억압적 체제에 반발한 삶의 내용은 오롯이 우리게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복음’은 로마황제가 새롭게 등극되었을 때에 로마제국 전역에 퍼지는 소식이다. ‘황제가 바뀌었으니 너희는 새롭게 등극한 황제에 대하여 복종하라!’가 복음의 전부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도 동일하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보이심으로 온 세계의 왕이 되셨다. 또한 우리는 그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예수께서 왕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을 뿐이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단지 메시아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살아야 될 뿐이다.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눅 17:10, 새번역)'라고 .되뇌며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했는가?
온갖 법제도가 잘 갖춰진 세련된 나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제국의 압제가 은연히 숨겨졌던 로마제국, 그 위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다. 바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믿음’과, 그에 대하여 ‘부활’을 통해 세상의 판결을 뒤엎은 하나님의 ‘믿음’이 만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을 때와 비교해서, 제국이 지녔던 악의 속성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아, 물론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진보했다. 세상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증언해보이신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도상’에서부터, 그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해보인 하나님의 역사가 집약된 ‘빈 무덤’까지의 거리 정도만큼 말이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의 물음이 고스란히 의미를 지니는 세상 속에 살아간다. 여전히 악은 창궐하며, 의인들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다시 메시아가 올지라도 여전히 죽임당할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렇기에 세월호, 부정선거, 삼평리, 밀양, 재능, 쌍용 등등. 수많은 악의 세력의 창궐가운데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바로 하박국처럼. ‘하나님 너무한 것 아니십니까?’라고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대해 신실하셨고,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인간 예수에 대해 신실하셨다는 이야기가 우리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은 백성이라고 일깨워주신다.
우리게 선택지는 단 하나 밖에 없다. 예수가 그랬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체제에 저항하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살아내는 것, 그러한 삶 위에서 우리는 로마서에 기록된 바울의 외침의 뜨거움을 비로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한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눅 17:10a, 새번역) 다시 한 번 그 질문을 생각해보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필자의 착각이었으면 좋으련만.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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