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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 어느 기독출판인,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다 -






Scene #.1 식물

교회에 한 식물이 있었다. 화분에 담긴, 시들시들한 식물이었다. 이파리가 누렇게 변하고, 어떤 것은 툭툭 떨어지고. 누가 봐도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주 식물을 보며 말한다. “어머, 어떻게 하나.”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물을 좀 주어야겠는데.” “새로 구해와야 하나.” 이따금씩 물을 주고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있었지만, 식물은 점점 야위어가고 있었다.


어느 한 분이 신경을 계속 쓰며 관리하기 시작한다. 알맞은 양의 물을 주고, 가끔은 영양제도 준다. 그 식물 옆에 있던 다른 식물도 덩달아 관리를 받는다. 해가 더 필요한 식물은 창가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관리를 받으며 시간은 가고 있었다. 죽어가던 식물은 점점 푸르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잎도 새로 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분이 말한다. “어머, 저것 좀 봐요. 꽃이 피었어요.”


역시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흙에 영양도 주고, 물도 주고, 햇빛도 쬐어 주어야 한다. 식물이 아무리 자라서 잎도 피우고 꽃도 피우고 싶어도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관심 갖는 사람이 없었다면 진작에 이 식물은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식물을 관리하던 분께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 앞으로 이 식물은 어떻게 될까. 나는 가끔씩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막상 관리해야 하는 순간에는 꼭 잊어버린다. 이 식물은 오래 살 수 있을까.



Scene #.2 사람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아직 나이가 많이 든 것은 아니라 그런지 아등바등 살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또래가 많다. 집안이 가난해서 힘든 사람이 있다. 취업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다. 공부하고 싶은데 자금 사정이 마땅찮은 사람이 있다. 결혼을 해야 하는데 대출을 받지 않으면 주택 자금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삶에 관한 열정은 모두 충분하다. 어느 정도 환경이 안정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살 사람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집안이 힘들어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려 하면 자괴감을 느껴가면서 우리 집안의 무능을 증명해야 한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넣고, 다른 사람보다 더 우위에 있기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한다. 요새 집 사면 호갱이라는데, 돈 많은 사람들은 세금 때문에 전세를 산다는데, 국가에서 주는 대출을 받으려면 집을 사야 한다. 1등 신문 조선일보에서 얼마 전에 기획기사를 낸 것처럼 달관하며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세상 물정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런 식의 기사를 내다니, 야비해 보인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삶의 밖으로 밀려나버린 사람들도 있다. 꽤나 자주 들려오는, 생활고로 인한 자살 소식. 서울역 근처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서울역 앞 으리으리한 어느 기업 건물 바로 옆에는 허름한 쪽방촌이 있다. 또 어디선가 구걸하는 사람들. 어딘가에는 일자리 밖으로 부당하게 밀려나 이에 저항하다가 시위꾼, 낙오자 낙인이 찍힌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 가까이에 있을 때의 나는, 마치 교회에서 죽어가던 식물을 보던 나와 흡사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약한 자의 친구>, 크리스틴 폴, 크리스토퍼 휴어츠 (복 있는 사람)


Thinking 1. 우정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크리스틴 폴과 국제 구호 활동가 크리스토퍼 휴어츠가 쓴 『약한 자의 친구』(복 있는 사람 역간)에서, 저자들은 우정과 돈의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가 누구를 친구로 삼고 있는지는 우리의 소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친구라면,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면 그 친구의 상황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지 않는 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가진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우정은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소유하고 소비하는지를 친구들에게는 숨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멀리 두는 편, 혹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짧게 방문하기만 하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약한 자의 친구』, 99쪽). 


너무 개인에게 호소하는 것 아닌가, 혹은 구조를 보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이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폴과 휴어츠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면 이것은 각자의 사유의 지평에 따른 과제로 다가온다. 폴과 휴어츠는 궁극적으로 소비방식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삶에서 문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대개 가난, 돈 문제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서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순히 돈뿐만은 아니다. 시간, 공간, 애정, 관심 등 우리가 가진 것은 유․무형의 것은 다양하다. 물론 돈을 빼놓을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다양한 것으로 어려운 친구에게 다가갈 수 있다. 정말 마음을 다하는 친구라면, 우리는 그 친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 제공할 것이다.



Thinking 2.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사회가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죽는 사람이 나온다. 대개 이런 죽음은 개인적으로는 기억될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 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하 『죽음』)이라는 책이 있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에서 2009년도에 낸 책으로 노무현, 김대중, 김수환, 용산 참사를 주제로 여러 필진의 글을 엮은 책이다. 『죽음』에서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를 쓴 정용택 선생님은 어떤 표상을 중심으로, 그 표상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투영시키는 대중들이 모여, 표상에 대해 애도하는 가운데,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표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노무현이고, 사라지는 사람들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다. 이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유감을 담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노무현에 대해 여러 이미지를 투영하며 애도하는 가운데,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 이면에 가려진 구조적인 문제는 배제된다는 것이다. 정용택 선생님은 글을 통해 정치가 사라진 애도를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노무현을 친구로 삼기는 쉽지만, 용산 참사의 희생자를 끌어안기는 쉽지 않다. 이들을 친구로 끌어안으면, 내게 주어지는 과제가 많아지고, 주어진 과제는 부담스러워진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이외에도 꽤 있다. 쌍용자동차, 삼성반도체, 제주 강정마을, 밀양에서의 피해자들. 이들은 대개 개인적으로는 기억되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어있다. 이 사건은 모두 아직 진행중이다. 여전히 희생당하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간헐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따금씩 글을 쓰거나 촛불을 드는 정도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움직임도 필요하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끈기다. 우정이란,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에 계속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피곤한 일이다. 어떠한 사회 문제가 한순간 크게 불거졌다가 막상 해결은 되지 않고 피로감만 쌓여가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세월호 사건조차 피로감 이야기가 나온지 꽤 되었고, 혹자가 느끼는 피로감은 점점 커져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니. 하지만 친구란, 이런 피로감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존재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동녁)


Thinking 3. 소비와 책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동녘 역간. 이하 『불평등』)에서 ‘소비’를 문제삼는다. 바우만은 오늘날 사람들 사이의 유대 관계가 취약하거나 사람들 사이에 연합이 쉽게 변하는 이유를 소비주의 문화를 주입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소비를 통한 쾌락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남들보다 한 발짝이라도 더 앞서 나가려는 욕망과 행위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뢰, 연대, 협력, 우정, 상호 의존, 인정, 존중 등이 나타나기 어렵다(『불평등』, 100-106쪽).


바우만은 우리의 위선을 지적한다.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평등, 상호 존중, 연대, 우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라든가 실질적인 삶의 전략을 잘 살펴보라... 스스로 제시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들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불평등』, 110쪽). 단순히 도덕적인 지적을 하는 것일까. 바우만은 분명히 “우리 대부분은 위선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불평등』, 110쪽)고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바우만의 태도는 체념적이다.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말과 행위의 괴리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바우만의 태도는 결연하지만 왠지 자신은 없어 보인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하지만 온갖 이야기를 하고 온갖 것을 읽고 생각해봐도, 음울하고 참혹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불평등』, 113-115쪽 



Thinking 4. 현실 기독교의 과제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럼에도 책임을 받아들인다. 되게 숭고하고 멋있는 태도이다. 말과 행동의 괴리를 감수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과제를 부여하다니. 말과 행동의 일치, 책임의식은 기독교가 늘 강조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경구절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 위주로 생각난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요 13:8).


20세기 중․후반에 나온 대표적인 기독교 언약문, 선언문에는 정의, 평화, 사회 참여에 관한 직접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1974년 로잔언약, 1989년 마닐라선언(제2로잔), 2010년 케이프타운서약(제3로잔)이 있다.

(해당 내용은 IVP에서 나온 『케이프타운 서약』을 보아도 좋고, 로잔운동 홈페이지, http://www.lausanne.org/ko/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잔언약은 기본적으로 복음 전파를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15조항 가운데 5, 13항은 명시적으로 사회적 책임과 정의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선교와 문화와 관련된 조항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불의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이것을 고발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로잔언약 5항 중).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구 중심의 기독교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각 지역으로 전파된 이후, 각 지역에서 토착화된 형태의 기독교가 자신의 현실 문제를 들고 로잔대회에 임했기 때문이다. 마닐라선언과 케이프타운서약은 로잔언약의 문제의식이 계속해서 심화,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성경적 복음에는 언제나 사회적 적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된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적이어야 한다. 참된 선교를 위해서는 겸허하게 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사회적 현실, 비애와 고통 그리고 압제 세력에 항거하며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마닐라선언 4항 중). “성경이 보여 주듯이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조적인 경제 정의와 개인적 긍휼, 존중과 관용 같은 온전한 성경의 증거를 품어야 한다... 세상이 제기할 수 없는 것을 선포하고, 분에 넘치는 부와 탐욕에 맞서지 않고서는 빈곤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선포할 용기를 갖자”(케이프타운서약 2부 B항 중).



Action

조용히 인터넷 창을 열고 은행 사이트로 들어갔다. 그간 마음은 있었지만 지목받지 못해서 차마 참여하지 못했던 쌍차(쌍용차) 챌린지를 위한 송금을 했다. 왜 하필 쌍용차일까. 세계 10위권 경제 상위 국가의 이면을 보여 주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생기고, 국정 기관이 가하는 법의 잣대는 강자에겐 호의적이고 약자에겐 가혹하다. 신명기 16:19가 생각난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죽어가는 식물을 보고도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차마 참여하지 못했던 쌍차(쌍용차) 챌린지를 위한 송금을 했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내 문제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삶의 한계 속에서 주어진 각자의 과제가 있을 것이다. 쌍용차 문제는 나에게 다가온 ‘작은 소자’ 중 하나다. 정의와 양심을 건드리는 문제다. 나의 작은 소자는 이외에도 있다. 가까이서 늘 내가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가난한 친구가 있다. 이럴 때는 제도 행정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인간의 존엄성을 낮추는 행정 절차도 문제고, 소자에게 가야 할 돈이 무의미해 보이는 행정 행위에 사용되는 것도 문제다. 제도권 정치와 행정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제도권에 어떤 식으로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개선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회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고 무엇이 더 옳으냐, 무엇이 더 필요하냐에 따라 이런저런 갈등이 일어난다. 모든 사안에 대한 해답을 가질 수는 없으나, 큰 기준 하나는 세운다. 명확히 보이는 고통의 당사자가 다가올 때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앞선 바우만의 말처럼, 나는 여전히 위선적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의 말처럼, 어둠 속에서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이런! 『행동하는 기도』(셰인 클레어본․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IVP 역간, 이하 『기도』)라는 책 제목과 내용이 생각난다(물론 이 책은 공동체의 기도와 행동에 관한 책이지만 개인적으로 주는 과제도 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설득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기도』, 21쪽).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과 우리의 현실을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1963년 「타임 매거진」과 한 인터뷰에서 젊은 신학자를 위한 말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성경과 신문을 들고 함께 읽으십시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신문을 해석하십시오”(Take your Bible and take your newspaper, and read both. But interpret newspapers from your Bible). 성경을 가지고 신문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는 여기서 얼마 전 김기현 목사님이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코리아」에 기고한 내용[각주:1]에 동의한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개혁한다.” 진지하게 성경의 모든 내용을 읽고 우리의 삶 여기저기를 돌아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하나씩 보인다. 이것을 실행할 담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이런, 셰인과 조너선의 충고가 다시 귓가에 울린다. 이번에는 책의 원래 제목이 귓가에 울린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세요”(Becoming the answer to our prayers).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6-30(비슷한 말씀으로는 눅 12:22-30)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새와 들풀을 예로 들며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에 임하심을 믿는다. 하지만, 그 새와 들풀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 속 어느 공간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그대로 두면 죽고 만다. 새장 속의 새, 화분 안의 꽃은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 사회 속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문명의 진행 중에 이 진행의 결과로 소외된 사람들은 늘 있다. 우리 주위에 있지만 감추어져 있다. 은연중에 우리도 은폐하고 있다. 야고보서 2:1-10은 회당 안에서의 부와 빈부의 차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를 그대로 사회 속의 우리 자신에게 돌려도 무방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돌볼 것도 말씀하셨다. 서로를 위한, 특히 약자를 위한 행동이란 과제를 늘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다.


잘 자란 식물을 보는 것은 흐뭇하다. 내게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식물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 식물을 내 문제로 삼는 순간 나의 어떤 것이나마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의 문제랴.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애매한 부담감을 가지고 산다.





설요한  /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신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과 미래 걱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독교 읽기’를 취미로 삼아 버렸다. 
덕분에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고민은 갖지만 차마 사회에 뛰어들지는 못하는 실천적 이원론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민하는 중에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1. http://www.ct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69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