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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박 목사님, 잘 읽었습니다만...




박 목사님, 잘 읽었습니다만...

- [서평] <목사의 딸>(박혜란 / 아가페북스) - 







내 기억 속의 박영선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 출신이다. ‘캠퍼스 복음화, 민족 복음화’라는 구호를 읊으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외치던 공동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에 관심이 많은 공동체였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가 외치는 구호와 행동 속에서는 하나님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실제 당시의 우리 공동체의 리더들은 여러모로 멋졌고, 또 여러모로 불편했다.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말 한마디로 공동체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었다. 반면 그들의 인격은 성숙치 못했다. 우리 사이에서는 은밀히 논란이 일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중일까?’ 한편으로는 ‘캠퍼스 복음화, 민족 복음화’의 구호 아래 공동체를 이끌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동체 지체들에 많은 상처들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던 것이 바로 박영선 목사의 설교집이었다. 이른바 ‘하나님의 열심’. 인간의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작정하심..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이었으며, 또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단어가 주는 상상력은 공동체 전체를 감응시켰다. 모든 지체들이 읽지는 않았지만 모두 ‘박영선’과 ‘하나님의 열심’을 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 인격을 희생시키는 리더가 아니라, 목적은 하나님께 맡기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을 가다듬어가는 리더의 꿈 말이다.



괜히 첫 사랑의 변질을 바라본 것 같아서 마음이 텁텁할 뿐이다


박 목사님, 조금 실망입니다

훗날 본인은 박영선 목사를 한 북콘서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틴 로이드 존스와 영국교회의 처참한 현실’이라는 난감할만한 질문에 ‘집에서 좋은 아빠 노릇을 하는 것과, 밖에서 좋은 사람 노릇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우문현답을 제시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먹었다. ‘화려한 업적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깊은 인격의 내공을 지니는 사람이 되자.’


나는 박영선 목사를 오독한 것일까? 혹은 오해한 것일까? 아니면 내 입맛대로 바꿔 읽어낸 것일까? 사실 상당히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박윤선 목사의 가정사를 담아낸 <목사의 딸>로 말미암아 여러 의견이 난립하자 ‘인격’과 ‘업적’은 다른 것이라는 기존의 잣대를 토대로 ‘ 개인적으로 어떤 불명예와 부족함이 있은들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무슨 하등의 문제가 있겠는가?’라며 반문을 던졌기 때문이다.[각주:1]


박영선 목사는 ‘성화의 신비’라는 설교시리즈에서 줄곧 베드로를 깎아내렸다. 훗날 천국에서 베드로를 만나면 피해 다닐 것이라는 농담도 함께 던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면서 그는 ‘거대한 업적을 쌓은 위인’ 베드로를 우리 앞에 하찮은 ‘한 인간’으로 깎아내렸고, 그 이면에 서려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를 목도케 했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를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시킨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여, ‘박윤선’은 ‘하찮은 인간’이었을지라도 ‘계시와 이해의 갈림길에서 계시의 길로 가라고 안내판’으로 우뚝 솟은 인물이라고 격찬한다.


물론 말은 맞는 말이다. 앞뒤로 뒤집어봐도 크게 논리상의 틀림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지점은 똑같은 논리를 사용하여 어떤 사람의 업적은 깎아내리면서 ‘하나님의 열심’을 바라보게 했다면, 어떤 사람은 ‘실책’을 가리고 옹호하려는 의미로 ‘인간의 업적’의 위대함을 부각시켰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가 다윗의 실책, 아브라함의 실책, 야곱의 실책, 베드로의 실책을 가려내는 그들만의 ‘위대한 업적’을 부각시켰던 설교자라면(다른 의미로 “너희도 업적을 쌓아, 그럼 인격적 실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설교했던 설교자라면), 내가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괜히 첫 사랑의 변질을 바라본 것 같아서 마음이 텁텁할 뿐이다.



우리들의 흔한 아버지, 박윤선

박윤선 목사의 딸 박혜란의 책은 참 흥미롭다. 한 시대에 우뚝 솟은 거장 박윤선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박윤선에 대한 신학 비판도 시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증후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만큼 딸 박혜란은 어떻게든 아버지 박윤선을 넘어서려는, 그리고 그의 흔적을 지워내려는 시도가 책 곳곳에서 나타난다.(사실 오이디푸스 증후군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감정이다.)


그 이면에는 신학계의 거장으로 우뚝 서기위해 발버둥 쳤던(혹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업적을 쌓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인간 박윤선이 서 있다. 사실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다. 아버지들은 나, 그리고 가족보다는 더 큰 것을 바라봤다. 기업, 민족, 국가 등의 어떤 것 말이다. 인간 박윤선도 그랬던 것 같다. 보수주의, 칼빈주의, 조국교회를 위해.


하지만 우리는 인간 박윤선에 대해서 다루기 이전에 무엇이 복음인가 물어봐야 한다. 박영선 목사의 말처럼 ‘계시와 이해의 갈림길에서 계시의 가라고 안내판’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았고, 그로 말미암아 시대의 필요에 응답했다면 과연 가족 정도는, 아니 적어도 자신의 딸 정도는 희생되어도 되는 것이 복음일까?





한 여인의 발버둥

사실 <목사의 딸>의 문체는 조악하다.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또한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며, 또 한편으로는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격렬한 감정이 돋보이고, 때로는 그 감정으로 인해 전체적인 논리를 어그러트린다. 때로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물씬 풍겨 나오고, 때로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터져 나오며,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지워내고자 하는 저자의 몸부림이 애처롭다.


이런 문체의 조악함 때문에 <목사의 딸>은 신학자 박윤선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사실들은 ‘상처받은 딸’의 입장에서 해석되고, 재구성된 사실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박혜란이 신학자 박윤선의 딸이란 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받았던, 따라서 가장 많이 상처받은 딸 말이다.


한국 보수 신학계에서 우뚝 솟은 신학자 박윤선, 그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원망을 쏟아내는 딸 박혜란,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을 두고 왈가불가하는 우리들의 모습.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과연 이것이 복음일까? 아니라면 무엇이 복음일까?



과연 무엇이 복음일까?

<목사의 딸>의 저자 박혜란을 비판함으로써 인간 박윤선의 업적을 ‘수호’하려는 태도는 추잡하다. 물론 <목사의 딸>을 추켜세우며 인간 박윤선의 업적을 ‘무효’로 만들려는 태도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 박윤선에게는 업적과 함께 실책들이 얽혀있으며, 그의 딸 박혜란에게도 그리움, 애틋함과 함께 원망이 섞여있다는 점이다. 원래 인간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따라서 <목사의 딸>은 박윤선을 다루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실마리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 토대를 닦아내었지만 가정에는 불성실했던 한 신학자. 또한 아버지의 신학적 토대를 뛰어넘으려 시도하고 있지만 전혀 조악한 논리로만 일관하는 목사의 딸.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지켜보며 신학자 박윤선을 수호하기 위해 조악한 논리로만 일관하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 <목사의 딸>과, 그로 말미암아 벌어진 상황들은 우리네 세상만사의 축약판과 다름없다. ‘복음’을 말하고, 가르치는 이들 간의 이야기지만, 흔한 세상사의 이야기와 다름이 없다는 점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각의 실마리들을 던져준다. 


복음은 무엇일까? 분명한 사실은 신학자 박윤선에게도, 아버지 박윤선에게도, 딸 박혜란에게도 ‘이것이 복음이다!’할만한 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어설픈 논리로 신학자 박윤선의 업적을 옹호하는 박영선 목사에게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복음’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무엇이 복음일까? <목사의 딸>은 조악한 서술로 엮여진 책이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홍동우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





  1. http://rpress.or.kr/xe/367425 |목회칼럼| 박윤선 박사를 생각한다_박영선 목사 (출처: 기독교개혁신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