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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우리는 무신론자다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는 철학자 입니다. 그가 남긴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선언과 함께 기독교를 비판한 여러 가지 책들 때문이죠. 하지만 반대로 니체가 그리스도인,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안티크리스트>라는 책에서 그는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인 예수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유신론에도 무신론에도 다양한 스펙트럼(범주)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접근해야 합니다. 니체는 ‘어떤’ 신을 거부했느냐? 또는 ‘어떤’ 신을 죽였는가? 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물을 때에 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죽었다고 선언한 신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니체는 플라톤의 이분법 철학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데아)를 구분하며, 전자는 불완전하고, 후자는 완전한 세상을 의미하는 플라토니즘을 말이죠. 그는 그러한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파괴시킨다고 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그 기준에 현실세계를 맞추려 하다 보니 현실을 왜곡하게 되고, 부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집단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니체가 살았던 당시의 기독교이지요. 그는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다를 바 없음을 깨쳤습니다. 그들이 하는 종교적 행위, 그들의 삶의 방향 전체가 지금 여기를 위한 것이 아닌, 죽음 뒤의 세상을 위함임을 간파한 것이지요.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음을 희구하는 움직이는 송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또한 철학자이자 문헌학자인 니체는 계보학을 통해서 기독교가 만들어낸 교리는 자신들을 억압하던 권력자들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심리학적 동기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밝혔습니다.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복수를 위해서 예수를 사용해 선과 악, 자유의지,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보기에 이런 기독교는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 혹은 예수를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서구 근대 철학을 전파하는 종교였고, 내적으로는 복수심, 증오심의 명령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사랑한 예수는 기독교처럼 죽음 이후의 영적인 세계에 우리의 삶의 목적이 있다고 전파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선포된 하나님나라를 살아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세상. 예수는 그런 하나님나라를 ‘실천‘을 통해서 드러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소망’하고 왜곡했지만, 예수는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기독교의 종말론은 죽음 이후의 세상만을 강조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 이후, 그 이후의 삶을 소망하게 함과 동시에 종말 후 이루어질 새 예루살렘을 현실에서 살아내기 위한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실천’과 ‘소망’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니체는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나라가 주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사상을 완전히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적인 신앙에 갇혀있던 당시 기독교에겐 ’지금 여기‘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보는 시선이 필요했기에 그의 날선 비판은 아주 시기적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시소의 중앙에 놓여있다면, 기독교가 한 쪽에 앉음으로 치우쳐졌던 진리를 바로 놓기 위해 니체는 완전히 반대편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신학자 앤드류 커크는 “종교가 왜곡되고 조작된 하나님 상을 반영한다면 우리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는 성서가 바라보는 하나님나라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에 필요한 메세지를 선포한 선지자적 역할을 했다고 봐야합니다. 플라토니즘에 물든 기독교, 예수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이 가져다준 ‘유익’에 초점을 맞추었던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왜곡된 하나님의 상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과연 니체의 비판을 수용했을까요? 또는 그 비판을 넘어섰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한국기독교의 현주소는 니체는 커녕 플라톤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플라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직도 단절된 저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종교, 그리고 여전히 저 세상을 위해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플라톤의 신을 죽여야 합니다. 소위 영적인 세계만을 바라보다가 지금 여기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는 꼴을 벗어나야합니다. 왜곡된 신의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상(이미지)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니체가 필요합니다. 당당하게 그런 신은 죽었다고 삶으로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실천을 통해서 지금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명하는 전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장대근 / 부산 동서대학교 청소년 상담심리학과 휴학생이자 로고스서원 18기.

전공을 버리고 인문학자의 길을 택한 과감한 남자. 

현재 휴학을 하고 주유소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