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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롤즈와 테일러, 그리고 차별금지법





존 롤즈(John Rawls)는 오늘날 ‘정의론’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부활시킨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는 오늘날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 되었는데,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들의 특수한 부분들에 대해서 무지의 장막을 드리우고 오직 절차적 정의에만 충실할 것을 요청합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서로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이나 인간관, 사회적 가치를 거론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론하게 되면 합의가 깨지고 사회의 형성이 불가능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롤즈가 이렇게 절차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분배의 공정함을 강조한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주장하면서도 기회의 평등과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보장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인정과 감정, 그리고 지금과 같이 종교적 열망에 쉽게 휘둘리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절차적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롤즈는 이 테제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또 공동체주의의 비판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옹호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권리를 지닌 개인은 오직 일정한 제도를 갖춘 특정 유형의 사회 내에서만 존재함으로, 롤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옳음의 우선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모든 형식의 원자론이 범하는 기본적인 오류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고유한 목표들과 열망들을 지니고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지키려는 그런 개인은 특정한 문명 내에서만 가능한데, 원자론은 그 가능한 정도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 그런 근대적 개인이 나오려면 일정한 제도와 관행·법규·평등한 존중의 규칙·공동 숙고의 습관·공동의 결사체·문화적 발전 등이 오랫동안 발달해야 했다.” Charles Taylor, Philosophy and Human Science, Philosophical Papers 2 (Cambridge: Cambridge Uni. Press, 1985), 309.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적 합의는 공허하고 내용 없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철학에는 정작 ‘정치’가 빠졌다고 비판을 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러한 차이를 통해 치열한 공방과 투쟁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외연을 구성하는 형식과 틀을 고민하기보다는 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것’은 다양한 정치 참여자들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정체성들이 경합을 벌이면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분열할 때 발생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롤즈가 주장하는 정의론의 제1원칙은 ‘자유의 우선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인데, 개인 고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되물을 수 있습니다. 독특한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을 공적 영역에서 거론하지 않으면서 양심의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공적영역에서 이와 같은 기능들을 차단하고 순수한 절차적 정의만을 허용한다면, 과연 그 영역에서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롤즈도 자신이 말한 공적이성의 문제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의론을 수정보완한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자신의 논지와 상반되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입니다.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종교적인 열망, 즉 모든 인종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종교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종교적 주장에 근거해서 공적인 담론을 형성한 사례는 롤즈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결과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 킹의 정치활동은 말콤 엑스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주장이 입법화 될 수 있었습니다.) 롤즈는 이러한 사례가 자신의 공적이성에 대한 반례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공적인 담론을 만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공통적인 합의는 인류에 대한 온정과 우애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롤즈는 옳음의 우선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도덕적 인격체에 대한 강조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과 비인간적성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의 최저 계층의 권익을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분배 문제에 접근하는 ‘차등의 원칙’은 그가 공리주의의 핵심원리인 효율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얻어낸 최대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치적인 압력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큰 논란이 되었고, 지금까지 그 여파가 남아있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의견을 얼마든지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죠. 다만 그 참여의 방식이 지극히 정상적인 합의에 의해서 가능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정치담론은 너무나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담론이성이 되었든, 롤즈의 공적이성이 되었든 제발 좀 상식을 지키자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토론을 통한 대화와 타협, 그리고 견제와 비판이야말로 민주주의 정치의 가장 중요한 규범적 가치일진데, 아직까지 한국의 공론장은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 속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한참이나 뒤쳐져 여전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정치, 감성의 정치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일단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롤즈의 정의론이 먼저 소개되고 정착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화를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근본주의자들의 반민주적인 행패로부터 공론장을 지키고 보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상식을 뛰어 넘고,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기본적인 상식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경환 / 남아공에서 공공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