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이후로 출판계의 불황은 더 깊어지는 모양새입니다. 문학과 신학의 대형 표절들로 인해 책의 언어는 더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책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개신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는 신적 추구의 향기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가히 욕망의 리스트라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광장, 청춘>이 북섹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어느 때보다 서평은 대중화 되었지만, 책의 힘을 되찾아줄 곧은 심지의 비평은 찾기 어렵습니다. SNS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은 쓰는이와 펴낸이, 읽는이의 마음을 즐겁게는 해줬을지 모르나 독서의 근육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찬으로만 일관하는 서평이 아니라 공정하고도 정직한 비평일 것입니다. 예리하지만 여전한 애정으로 만들어갈 <북스>를 통해 선보일 서평과 다양한 책 소개에 주목해 주십시오. 마음껏 즐겨주시고, 부족한 점이 보이시면 저희에게 질타(?)도 보내 주십시오. 개신교안에서도 새로운 차원의 독서 생태계가 들풀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 <북스>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우리 손에 들린 '세계 복음주의' 지도
[서평] 이재근의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복있는사람, 2015)
글. 강성호 _20150628
번역자에서 저술가로
이재근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종교개혁은 끝났는가?>(CLC, 2012)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미국 복음주의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책이었는데, 당시 유사한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로 있던 터라 큰 도움을 받았다. 흥미가 생겨 이력을 찾아보니, 그는 이미 복음주의 역사를 매우 활발하게 국내에 소개하고 있었다. <복음주의 확장>(CLC, 2010), <근현대 세계기독교 부흥>(CLC, 2011), <복음주의 세계확산>(CLC, 2014) 등 이재근은 2013년을 제외한 최근 4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굵직굵직한 복음주의 역사서를 번역했다. 전공이 다르기에(필자는 한국현대교회사를 전공한다) 그가 번역한 책을 모두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복음주의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성실한 번역자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 세계기독교 관점에서 보는 복음주의 역사>(복있는 사람, 2015)는 ‘번역자 이재근’이 아닌 ‘저술가 이재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본래 저자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정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마친 전문 연구가다. 국내에도 3~4편의 교회사 논문을 기고한 바 있다. 보통 전문적 글쓰기에 익숙한 연구자의 글은 대중성이 모자라기 쉬운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나 교회사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읽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쉽고 명료하다. 아마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그런 듯하다. 1
20세기 복음주의의 방향은...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를 압축하기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는 20세기 복음주의의 방향을 결정지은 주요 주제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세계화, 성경해석학, 변증학, 공공성, 오순절. 내 생각에 이는 남반구 기독교와 변증,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 주제로 재분류할 수 있다. 책의 2장(세계화)과 6장(오순절)은 20세기 복음주의가 세계기독교의 맥락 속에서 어떤 특징을 갖는지를 고찰하는 부분인데, ‘남반구 기독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밝혀둔대로, 저자의 스승인 스탠리(Brian Stanley)가 저술한 <복음주의 세계확산>의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33쪽). 그런데 그와 비교할 때 도드라지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의 독창적인 특징이 바로 ‘남반구 기독교’에 관한 성찰이다. ‘남반구 기독교’는 세계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는 현상에 착안하여 붙여진 용어다. 국내에는 아직 그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할 때 ‘남반구 기독교’는 후기 기독교세계의 선교신학에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남반구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풍성하는 점은 이 책의 장점으로 꼽을만 하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20세기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반지성·반문화에 반대하며 일어난 기독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한편, 16세기 유럽 대륙의 복음주의가 가톨릭에 반대하며 일어났고, 18세기 이래의 영미권 복음주의가 국교 내지 세속화에 대해 저항한 것처럼, 20세기 복음주의는 무신론, 자유주의 등에도 맞서야 했다. 이전의 크리스텐덤(Christendom)과 달리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성서비평에 맞서 성경해석학을 발전시키고(3장),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변증학을 단련한 것(4장)과 같은 복음주의 운동의 노력을 세심하게 잘 살피고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독창성은 ‘계몽주의’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의 운영 원리를 신의 섭리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하고 종말 대신 진보론적 세계관을 구축한 계몽주의는 18세기 이후 서양 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지난 300년간의 근대 서양 기독교 역사는 계몽주의와 동침한 역사”이며(133쪽), 오히려 계몽주의는 복음주의의 ‘적대적 동반자’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저자는 18세기의 제1차 대각성 운동(138쪽)이나 근대 선교(141쪽)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복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대립 구도로 파악하는 일반적인 역사 이해와 전혀 다른 참신한 해석이다.
복음주의가 '사회성의 스캔들'을 극복하려면..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기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1974년 로잔 대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20세기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를 다룬 5장이다. 저자는 복음주의자 사이에 ‘스캔들’이라는 표현이 일종의 격언처럼 사용된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아예 ‘사회성의 스캔들’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이 개념을 엄밀하게 규정하지 않고 모호하게 사용한다. 물론, 5장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사회성의 스캔들’이 사용된 맥락이 교회 밖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복음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것임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말이다.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옛 것을 찾아 나서는 운동에 더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그 단적인 예로 저자는 사회참여의 문제를 꼽는다. 제2차 대각성 이후의 복음주의는 영적인 측면은 물론 사회적인 문제들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170쪽). 이것을 보통 ‘총체적 복음’이라 지칭한다. 그런데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가 (애초의 목표와 달리)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논쟁 사이에서 ‘총체적 복음’을 상실했으며, 특히 사회복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성의 스캔들’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한다(175쪽).
1974년 로잔 대회는 20세기 복음주의의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177쪽). 한국현대교회사를 전공하고 있고 그것이 한국교회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간 로잔 대회에 관해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다. 고맙게도 이 책을 통해 로잔 대회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미전도종족 집단’이라는 주제가 로잔 대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195쪽), 비서양 기독교가 복음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장을 처음으로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97쪽). 물론, 로잔대회를 통해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로잔 74대회 ⓒlausannemovement / Flickr
지성사를 넘어 운동사로
정리하면, 이 책은 기존의 연구(스탠리)와 저자의 독창적인 해석이 잘 어우러진 책이다. 20세기 복음주의를 5가지 주제로 나누어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나는 이를 다시 남반구 기독교와 변증, 사회참여로 압축하였다). 아쉬운 점도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일종의 20세기 복음주의의 ‘지성사’다. 20세기 복음주의의 등장과 발전에 공헌한 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20세기 복음주의의 ‘운동사’는 상대적으로 서술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가령 사회참여 문제를 다룬 5장에서 20세기 복음주의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얘기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보들을 충분히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저자의 말대로, 책 한 권에 모든 걸 담을 수 없으며(213쪽), 이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책의 성격이나 분량을 고려할 때 무리일 수 있다.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들을 최대한 친절하게 얘기해주고 있다. 다만 복음주의의 4대 핵심 요소 중 하나인 ‘행동주의’를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 설명하는 작업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끝내 남는다. 차후에라도 관련 연구가 진행된다면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사의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이 책은 20세기 복음주의의 역사를 한국교회사의 맥락 속에서 살피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이라는 사실은 지적해야겠다. 이와 같은 접근이 가능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호남 지역을 선교한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를 연구한 연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근본주의 기독교단체 ACCC의 매킨타이어(Carl McIntire)가 한국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83쪽),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를 받아들이는 한국과 영국의 차이(102쪽), 경건주의 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의 관계(129쪽), 19세기 후반의 선교운동을 이끈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과 한국교회의 관계(141쪽), 한국장로교에 대한 반틸(Cornelius Van Til)의 영향력(155쪽), 로잔 언약이 늦게 논의된 배경(186쪽), 한국교회사의 초기에 이루어진 지도권의 이양(201쪽) 등 이 책은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논의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 해외의 논의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주의 운동을 우리의 맥락과 역사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에필로그에서는 간략하지만 한국 복음주의의 역사를 서술해 놓기도 했다. 저자가 작년 상반기에 세계 복음주의를, 하반기에 한국 복음주의를 강의한 사실을 복기한다면, 이 부분은 “To be Continued"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머지않아 <한국 복음주의 지형도>와 같은 책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는 ‘학자’ 이재근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아울러 이 책이 한국교회사 영역에서 보다 많은 소장학자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강성호 /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개독교 현상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고 싶어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전남 순천에서 아둥바둥 살고 있다.
- Jaekeun Lee,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s and the Formation of Presbyterianism in Honam, Korea, 1892‐1940: Traditions, Missionary Encounters, and Transformations,” Doctor of Philosophy Thesis, University of Edinburgh,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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