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에서 야훼로, 제국에서 미래로
[서평] 그레고리 비일(Gregory Beale)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새물결플러스, 2014)
글. 윤유석 _20150701
흥미로운 책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레고리 비일(Gregory Beale)이 쓴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성경신학적으로 바라본 우상숭배와 하나님 형상의 의미』이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 된다: 우상숭배의 성경신학(We Become What We Worship: A Biblical Theology of Idolatry)’ 저자는 구약성서신학의 난제 중 하나인 이사야서의 ‘마음을 둔하게 하시는 문제’(이사야 6:10)에서 출발해 우상숭배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그는 우상에 대한 성서의 비판을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 된다.”라는 명제로 깔끔하게 정리한다.
성서에 나타난 우상숭배 문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평소 고민하던 주제이기도 하다. 우상숭배에 대한 성서의 비판은 “유일신교인 유대교가 타종교에 대해 취한 배타적인 태도”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될 수가 없다. 여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문화적, 신학적, 정치적 상황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가장 먼저 비판한 우상숭배가 바로 야훼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라는 점, 다시 말해 시나이산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야훼를 금송아지의 형태로 우상화한 사건이라는 점을 떠올리자. 단순히 “우리의 신은 참된 신이고 너희의 신은 우상”이라는 식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인 야훼조차도 잘못 숭배될 경우에는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나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 같은 성서적 전통에 근거한 현대철학자들은 우상의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내기도 한다. 가령, 우리 시선이 유한에 머무르도록 하여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는 것은 우상(idol)이고, 우리의 시선이 무한을 향하도록 하여 자신을 넘어서게 하는 것은 참된 성상(icon)이라는 것이다. 1
풍우신 아다드(adad). 대체로 황소를 탄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내가 아는 한 우상 문제는 고대근동의 정치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사회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다. 특정 신을 향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특정 신에 대한 신앙이 철회된다는 것은 그 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퓌스텔 드 쿨랑주(Fustel de Coulanges)가 쓴 『고대도시』 같은 책은 고대 도시국가 내에서 종교와 정치가 얼마나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종교사회학적 연구들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편 고고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국가가 강대국에 점령당한 뒤 종교를 바꾼 사례가 흔히 발견된다. 가령 삼알 왕국은 신앗시리아 제국의 티글랏 필레셋 3세에 의해서 정복당한 뒤, 그들 조상의 신 라킵-엘(Rakib-el)을 버리고 신앗시리아 제국 왕실의 신인 달신 ‘신(Sin)’을 새로 섬겼다. 삼알 왕국의 왕 바르-라킵의 비문에는 삼알 임금이 하란의 주인인 달신을 향해 “내 주님, 하란의 주인이시여……”라고 기도한 구절이 남아 있다. 2
성서를 봐도 정치와 종교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이집트를 공격한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보아라, 내가 테에베의 신 아몬에게 벌을 내리고, 파라오와 이집트와 그 나라의 신들이나 왕들에게도 벌을 내리고, 파라오뿐만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도 벌을 내리겠다.”(예레미야 46:25) 고대근동의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집트가 겪는 위협을 이집트의 신들에게 내려진 벌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 모압의 멸망과 관련해서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모스 신도 자기가 섬기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예레미야 48:7) 암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 신 몰렉이 포로로 끌려가고, 몰렉을 섬기던 제사장들과 고관들도 다 함께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예레미야 49:3) 이러한 구절들은 고대 도시국가들의 전쟁 방식과도 연관된다. 고대사회에서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은 그 국가가 섬기는 신들의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이 때문에 한 국가는 다른 국가를 점령하면 제일 먼저 그 국가의 신전을 약탈하여 신상을 포로로 잡은 뒤 자신들의 신전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포로가 된 적국의 신상을 자국의 신상 앞에 엎드려 놓았다. 사무엘상 5장에서 필리스티아인이 유대인의 언약궤를 빼앗아 자신들의 다곤신 앞에 두었던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전쟁에서의 승리는 신의 승리였고, 전쟁에서의 패배는 신의 패배였던 것이다. 퓌스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달신 신(Sin)
전쟁 중에, 포위군은 도시의 신을 탈취하려고 하는 반면, 농성군은 최선을 다해 그를 지킨다. 때때로 사람들은 신이 떠나가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신을 사슬로 매어 놓았다. 또는 적이 그것을 찾을 수 없도록 꼭꼭 숨겨 놓기도 했다. 또는 적이 신을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도문에 대항하기 위해 신을 붙잡는 데 효력이 있는 기도문을 사용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호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강력한 신의 이름을 비밀로 했다. 적들은 결코 그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적군 편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도시는 결코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과 관련해서도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벨 신이 수치를 당하였다. 마르둑 신이 공포에 떤다. 바빌론의 신상들이 수치를 당하고, 우상들이 공포에 떤다.”(예레미야 50:2) 마르둑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보호하는 최고신이다. 유명한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성서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을 그 제국의 보호자인 마르둑의 패배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우상숭배가 정치적 역학관계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상숭배에 대한 유대교 예언자들의 비판 역시 순수한 종교적 관심에서 유래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우상숭배 비판은 한편으로 고대근동지방의 약소국이었던 유대-이스라엘 왕국이 어떻게 정치적 주권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곧 제국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국가의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함부라비 법전에 새겨진 조각. 함무라비가 태양신 샤마쉬(Shamash)로부터 법전을 받고 있다.
비일은 이러한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보다 성서신학적인 관점을 채택한다. 그는 성서가 우상숭배의 문제를 ‘감각기관 기능 장애 언어(sensory-organ-malfunction language)’와 연관 짓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성서는 우상숭배자를 빈번하게 “눈이 있어도 눈 먼 자요, 귀가 있어도 귀가 먹은 자”라고 비난한다(이사야 43:8).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요, 무지한 자들이니, 마침내 수치만 당할 뿐이다.”(이사야 44:9), “불을 때고 남은 토막으로는 신상 곧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숭배하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나의 신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하고 빈다. 백성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사야 44:17-18) 눈과 귀의 형상은 있어도 실제로는 보고 듣지 못하는 우상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 또한 정작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말이다. 비일을 따르면, 이와 같은 표현은 우상숭배자가 점차 우상과 동일해지고 결국 우상처럼 파멸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비일은 말한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을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존재로(이사야 6:9-10), 불타는 나무로(이사야 6:13a) 묘사하는 표현들은 우상숭배에 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즉, 이런 은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우상과 같은 방식으로 심판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우상숭배에 대해 처벌받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불순종하는 나라에 적용되었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우상숭배자가 자신의 우상을 닮기 시작한다는 개념도 포함한다. 즉 우상숭배자는 그의 우상처럼 영적으로 눈멀고 귀먹게 된다. 여기에는 반어법적 조롱, 즉 이스라엘은 우상이 살아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그 우상은 생명 없는 저주받은 대상이며, 이스라엘도 그와 똑같이 되었다는 조롱이 담겨 있다. 4
비일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뒤르켐의 종교사회학 이론을 활용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모방하는 성향을 보인다. 특히 토템신앙을 가진 고대인들에게는 부족이 숭배하는 동식물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성스러운 특징을 얻으려 한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동류를 만들어내는 원리’ 때문에 우상숭배자는 결국 우상을 닮게 된다. 우상숭배에 대한 성서의 비판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우상숭배는 결국 우상숭배자를 우상과 같은 상태로, 즉 눈과 귀가 멀어 파멸하게 되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토템 신앙의 숭배자가 부족이 성스럽게 여기는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하려 하고, 그를 통해 그 본성에 참여하려 한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때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동물과 식물을 통해 드러난 ‘성스러운 힘’이지, 단순히 동물과 식물의 외적인 형태 혹은 ‘우상 자체’는 아니다. 토템 신앙을 비롯한 타 종교의 신상숭배에 대한 비일의 논지가 불충분한 이유다. 오히려 비일과 같은 주장은 자칫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의 제의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5
지하수신 에아(Ea). 어깨 위로 물과 물고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 된다.”라는 고대근동의 정치사적 맥락 속에 기입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우상숭배자는 자신이 숭배한 우상처럼 눈이 멀고 귀가 막혀 결국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비판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 관한 성찰로 이해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라는 커다란 제국들 사이에서 정치적 줄타기를 해야만 했던 약소국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이 빈번하게 주변 제국의 우상을 도입하여 혼합주의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이유도 이와 같은 지정학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가령 통일왕국 시대에 솔로몬이 수많은 이방여인과 정략결혼을 하며 여러 나라의 우상을 들여온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처럼 우상숭배를 통해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치 그 우상들처럼 이스라엘의 눈과 귀도 멀게 되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에 순응하려 한 이상 고대 이스라엘은 자유로울 수도, 안정적일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주변 세력들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자신의 귀로 듣지 못한 채 주변 세력들의 귀로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 결과 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힘의 논리 안에서는 강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약자는 그에 따를 뿐이다. 그 상황에서 약자가 홀로 꿈꿀 수 있는 자유, 해방, 미래, 희망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가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우상처럼 무능력하게 되고 말 것이라 비판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예언자들이 그토록 간절히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시는 야훼만을 신뢰하라고 외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성서는 여러 대목에서 필연적 질서를 상징하는 우상에 대항하여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여는 야훼의 능력을 강조한다. 제국이 내세우는 우상은 현재를 고정해 불변하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난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장차 올 일들을 알지 못하지만, 역사의 신인 야훼는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과거로부터 새로운 미래로 이끈다는 것이다. 제2이사야는 바로 이 점에서 우상과 야훼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야훼는 우상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말해보라고 요구한다 6(이사야 41:21-23). 그렇지만 우상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헛것일 뿐이다(이사야 41:24). 반면 야훼는 제국과 힘의 질서가 무너지게 될 앞으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이사야 41:25).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새로운 미래를 이스라엘에게 알려준 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에누마 엘리쉬』를 묘사한 토판. 마르둑(Marduk) 신이 티아마트(Tiamat)를 공격하고 있다.
너희 우상들 가운데서, 어떤 우상이 처음부터 이 일을 우리에게 일러주어 알게 하였느냐? 누가 이전부터 우리에게 일러주어서, 우리가 “그것이 옳다.”하고 말하게 한 일이 있느냐? 일러준 자도 없고, 들려준 자도 없었다. 우리는 너희 말을 들어본 일이 전혀 없다. “나 주가 비로소 처음부터 시온에게 알렸다. ‘이런 일들을 보아라.’하고 말하였다.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냈다. 내가 우상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가운데 말을 하는 우상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우상도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였다. 보아라, 이 모든 우상은 쓸모가 없으며, 그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이다.”(이사야 41:21-29)
그렇다면 우상과 야훼 중 누구를 의지할 지 선택하는 문제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희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 약자에게 자유와 해방이 주어지는 새 날을 보고, 듣고, 소망하는 능력. 우상숭배는 바로 그러한 능력을 빼앗아간다. 성서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제국이 주도하는 힘의 논리에 함몰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현실에 나름대로 긴밀히 대처하려 했지만, 오히려 다가올 역사와 희망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 된다”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가 현실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숭배하면, 우리의 현실은 필연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올 구원의 날을 희망한다면, 우리는 현실을 넘어서는 야훼의 미래를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윤유석 /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철학적 해석학을 중심으로 관심 분야를 넓혀가고 있지만 정작 전공인 철학보다는
종교학이나 신학 공부에 더 애착을 많이 느낀다.
학부 졸업장에도 복수전공 과목으로 종교학이 찍혀 있어 매우 뿌듯해 하고 있다.
- 구약학자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구약성서는 이교, 즉 민족들의 전체적인 종교체제에 대한 위대하고 포괄적인 부정으로 나타난다. 구약성서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종교비판적인 과정이 실제로 전개되었다. ── 그러나 구약성서가 다른 신들, 종교들, 그리고 제의들을 공격하고 파괴한 것은 아주 문제성 있는 종교비판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 신의 우월성과 독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기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진 것이 아닌가? 구약성서를 피상적으로 읽는 독자만이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소위 ‘자기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한스-요아힘 크라우스, 박재순 옮김, 『조직신학: 하느님의 나라-자유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86, 136-137쪽.) [본문으로]
- 주원준. 『구약성경과 신들: 고대 근동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 한님성서연구소, 2012, 66-67쪽 참고. [본문으로]
- 퓌스텔 드 쿨랑주, 김응종 옮김, 『고대도시: 그리스·로마의 신앙, 법, 제도에 대한 연구』, 2000, 216쪽. [본문으로]
- 그레고리 K. 비일, 김재영·성기문 옮김,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성경신학적으로 바라본 우상숭배와 하나님 형상의 의미』, 새물결플러스, 2014, 91-92쪽. [본문으로]
-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은봉 옮김, 『종교형태론』, 한길사, 2012, 64-66쪽 참고. [본문으로]
- 아누(Anu), 엔릴(Ellil), 에아(Ea) 등 고대근동종교의 신들은 모두 자연물을 다스린다. 아누는 하늘신, 엔릴은 풍우신, 에아는 지하수신에 해당한다. 반면 야훼는 ‘자연물의 신’이 아니라 ‘역사의 신’이라는 점에서 다른 고대근동종교의 신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가령, 야훼는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15a)이라고 소개한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이러한 점을 토대로 고대근동종교의 신들을 영원한 현재의 신으로, 야훼를 미래의 신으로 구별하였다.(위르겐 몰트만, 이신건 옮김, 『희망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11, 52쪽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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