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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세월호 참사와 고통·고난 신앙 : 욥기서 묵상을 중심으로



※ 이 글은 <교회개혁실천연대>의 월간 소식지 '공감' 12월호에 실린 박종운 변호사님의 칼럼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로 대한변협 세월호 특위 활동을 계속해 오신 박종운 변호사님의 글을 <광장, 청춘>에도 함께 소개합니다.  





저는 지난 4월 CLF(기독법률가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대한변협 세월호 특위에 참여하여, 대변인, 현장대응지원단장, 총괄지원팀원, 특별법제정팀장/원 등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7일에는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세월호 참사 발생 205일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지금은 피해자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는데 조력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많은 학부모들은 내 자녀도 언제든지 이러한 참사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왜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가?” 의구심에 젖어들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발생하는가? 왜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각종 매체의 영상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배 안에 남아 있던 3백여 생명이 죽어간 것을 알게 된 국민들도 한동안 헤어나기 어려운 고통에 빠져들었으며, 그로 인해 국내 소비경제가 불황에 빠져들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형 참사로 인한 고난/고통에 대해 각 종교들도 다양한 태도와 행동을 보였습니다. 참사가 발생하자 개신교 교회들은 서둘러 헌금을 모으고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가 음식물을 내 놓으며 봉사활동을 펼쳤지만, 막상 유가족들은 자녀를 잃은 애끓는 마음에 음식물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정성을 다해 시신을 염하는 모습을 통해, 원불교에서는 말소리 내는 것마저 저어하며 푯말을 들고 빨래감을 모아 빨래를 해 드리는 등 여러 봉사활동을 통해 고난/고통 중에 있는 분들과 공감을 나누었습니다. 


불교 특히 조계종 계열의 정토회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큰 성과를 거두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가톨릭은 방한 기간에 교황이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더 많은 횟수와 시간을 들여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나서 위로하며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전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교황이 사고/고난/고통의 원인을 밝혀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니고 단지 고통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많은 분들이 성당을 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각 교단별 예배 및 지원활동을 통해, 성서한국운동 진영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독인모임’ 등을 통해 많은 좋은 일을 했지만, 일부 대형교회 목사, 교단 명망가들의 실언 혹은 왜곡된 발언으로 인해 큰 실망을 안겨주고 비판/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세월호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고난/고통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 개신교가 고난/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고난을 당하기보다는 너무 쉽게 지나치게 빨리 정죄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분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 지난 7월 26일 예장 통합측 총회장 등 임원진과의 <세월호 참사 100일 특별좌담회> 때에는 <한국교회에 드리는 부탁 말씀>으로 ① 재난/재해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신앙적 관점/입장을 정립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나아가, 재난/재해 당한 사람들 즉 고난/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달라, ② 한국교회 또한 국가적 사회적 재난/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백서, 매뉴얼을 만들어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③ 한국교회 또한 특히 미자립교회, 가난한 교회, 구제/봉사 사역 등과 관련하여 안전에 대한 체크/보강 작업을 해 달라고 요청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고난/고통당한 분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을까요? 욥기서 말씀을 보면서 욥과 세 친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욥기서 전체를 통해 저자는 욥이 자신의 죄나 잘못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고 실제로 욥은 오히려 그의 온전한 신앙으로 인해 고통/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는 고통받는 욥을 보면서 인과응보론에 빠진 나머지 욥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있으니까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며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의 고난/고통은 죄로 인한 것 단 한가지 밖에 없다고 맹신한 나머지, 고난/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 중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꿰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바람에 나중에 하나님은 세 친구를 크게 책망하시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고통/고난의 원인은 최소한 3가지 이상으로 보입니다. 


① 죄로 인한 고통/고난 즉, 죄의 대가로 인한 고통/고난입니다. ‘죄’란 SIN 즉, 하나님이 아닌 내가 주인/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로 인한 대가로 치르게 되는 고난/고통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죄로 인한 고통’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로 인한 고통’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공동체 전체 혹은 구성원 중 일부의 죄로 인한 고통/고난입니다. 다윗시대 다윗의 범죄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적인 공동체의 특성상, 공동체 일부의 죄는 공동체 전체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② 믿음/의로 인한 고난/고통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오히려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나 혹은 공동체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이것은 시험(test), 연단, 훈련으로서의 고통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공동체를 성숙케 하시려고 훈련하기 위해 주시는 고난/고통입니다. 꼭 시험을 봐야만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및 준비과정을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실력을 쌓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③ 애매한 고통/고난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불가지론적인 고통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잘 알지는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고난/고통의 원인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왜 이러한 고난/고통이 나 혹은 우리에게 닥쳐 온 것인지, 그 원인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고, 그 원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죄로 인한 고난/고통은 자복하고 회개한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처벌 등)를 치른 후 자숙의 기간을 통해 돌이킴, 치유, 회복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고통은 인내하고 견디면서 자신을 더욱 연단하여 성숙, 성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애매한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하니, 우리는 고난/고통 받은 이들을 함부로 예단하며 정죄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왜 고난/고통 받는 이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질까요? 가부장제 시대의 잘못된 아버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께 투영한 결과는 아닌지, 고난/고통 받는 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을 돕는다는 미명 아래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은 아닌지, 고민이 깊어갑니다. 아무래도 어머니 하나님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욥에 대해서도 그러하듯이, 고통/고난 속에서 울부짖는 신음, 한탄, 원망을 하나님도 함부로 탓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심(本心)이라기보다는 고통/고난을 견디다 못해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함부로 그분들을 향해 “시끄럽다”고 꾸짖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하나님은 “욥아, 미안하게 되었다. 사실은 내가 네 믿음의 온전함을 걸고 사탄하고 내기를 했다.”면서 고통의 원인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욥의 원망과 한탄에 대해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치시는 거에요?”, “욥아, 네가 가장 믿기 어려운 그 시점에 나를 믿어라! 설사 이번 일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를 믿어라!! 네가 모든 내막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나를 믿어라!!!” 문제 해결 방식이 다릅니다. 고난/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고난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욥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드립니다. 회개하고 안심하고 기뻐합니다. 하나님과 직면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거나 해결책을 말씀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이제 공의로운 하나님이 알고 계시니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고통이 와도 지나치게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고통은 하나님을 직면하는 지름길, 좋은 기회가 됩니다. “내가 네 고통과 고난을 알고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조차도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의 사이에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함께 한 것은 올 한 해 기독법률가로서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이었다고 생각하며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관련 법들의 통과를 전후하여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보장하게 되기를, 세월호를 비롯한 각종 참사의 피해자 및 그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 제공 : 교회개혁실천연대 (02-741-2793 / http://www.protest2002.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