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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어느 칼빈주의자(?)의 바르트 학원 수강기 ②


칼 바르트 <개신교 신학 입문> 강연(2/4강) 후기 

※ 이 글은 지난 8일부터 시작된, <현대기독연구원>이 주최하는 <개신교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 두 번째 강의에 대한 설요한 기획/편집위원의 글입니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4주 동안 함께 총 4회에 걸쳐 후기 글을 <광장, 청춘>에 게재합니다. 



내가 그에게 왠지 끌렸던 이유


내 신앙은 보수적이다. 질문을 던지는건 좋아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멈추게 된다. ‘여기선 더 이상 나아가기 어려워’라며.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완고한 신앙’이다. 예전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신앙을 갖고 싶었다. 기독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최소한 일주일에 1일 이상은, 그러니까 인생의 최소 14%이상은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20대의 어느 순간, ‘내가 왜 이걸 믿지’라는 질문이 찾아왔다. 교회생활은 습관이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구의 연대, 성경의 연대 등이 궁금해 인터넷과 도서관을 뒤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애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러다가 갑자기 믿게 되었다. 구약의 선지자, 복음서의 예수님, 신약의 사도들의 설교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때 도움을 준 사람은 로이드 존스였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네가 찾았던 근거에서 나오지 않는다. 은혜다.”라는 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에 넘어가 버렸다. 여기서부터는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믿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수업 시간에, 약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울고 있을 때, 나의 신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러한 질문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비록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그저 보통 세상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내 본질에 가깝다는 걸 알고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믿음은 대체 어떻게 나타나는 걸까? 분명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믿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로망이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분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 세상에서의 삶도 가장 급진적일 수 있다’는 로망. 이 얼마나 철부지같은 말인가. 일단 세상 경험을 쌓으며 풍파를 맞아 봐야 이런 말이 쑤욱 들어갈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물론 설명은 안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혹자가 “야, 어떻게 근거도 없이 그걸 믿냐.” 하는 말에는 “모르겠어요. 나도 어쩔 수 없어요.” 하는 대답을, “야,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 있냐.” 하는 말에는 “믿어서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이웃과 대화를 하는가이다. 공공성과 신앙은 조화가 되는가. 타종교인, 비종교인과 조화로운 삶은 가능한가. 그러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살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밑도 끝도 없이 믿는 건 광기를 유발하고, 발산되는 광기는 폐가 되는 것 아닌가. 신앙과 광기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답은 아직도 모른다. 물론 몸은 머리보다 빨라서 유들유들하게 세상에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였을까? 바르트를 읽으며 동질감을 느꼈다. 어, 이 사람 뭐지, 내 얘기 같은 얘기를 왜 책에서... 나랑 비슷한 과정을 거쳤나... 물론 이 사람은 대가로 평가받는, 무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어쨌건, 친근감이 느껴진다.



루벤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1625년.



신앙이란 무엇인가, ‘멜기세덱’과 같은 것


신준호 선생님의 2주차 강연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멜기세덱과 같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연의 대략은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개신교 신학 입문』 페이지)


바르트 신학에서 중요한 대목은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이라는 기간이다. 이것이 『교회교의학』 Ⅳ/1의 내용이다. 교회교의학 중 한 권을 읽는다면 먼저 Ⅳ/1을 읽을 것을 권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화해론이 여기에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잡지 않으면 바르트 신학을 이해할 때 헤매게 된다. 최초의 증인들의 특수함은 이 40일에서 나온다. 부활 후 제자들과 마주하는 것, 그 안에서 화해를 향한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 『교회 교의학』 화해론의 전체 내용이다. (이상 지난 시간에 대한 대략적인 보충설명)


바르트는 총신과 감신 사이에서 논의한다. (여기서 총신은 성서 문자주의, 감신은 신개신교주의[종교철학 및 역사학]를 말한다. 이것은 특정 교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띤다는 의미에서 쓰는 표현이다) 총신과 바르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서’에서 ‘최초의 증인들’로 넘어가려면 역사비평학이 필요하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최초의 증인들의 증언을 알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총신의 신학을 심화시킨 것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 계시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둘째, 기록된 말씀: 증인들의 말. 셋째, 선포된 말씀: 교회 공동체에서의 선포. 아마도 바르트는 총신과 감신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총신을 택할 것이다. (적어도) 성서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공동체는 최초의 증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2차적 지위의 증인들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한 사람들이다(44). 공동체는 ‘진리 질문’을 던진다. 진리 질문의 내용은 ‘들은 것을 바로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올바로 언어로 표현했는가’(46)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들은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전달하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신학에 관심을 가진 공동체이다(48). 따라서 공동체는 신학을 동반하고 신학은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학의 세 가지 요점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이다. 이 점에서 바르트와 총신의 신학은 90% 정도 일치한다. 성서관 정도가 차이가 있을 것인데 바르트는 ‘더 깊이 들어가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바르트는 작업가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적 증거가 신구약 성서의 본문 안에서 실제로 인지될 수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52)며, 해석학적 순환의 길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물론 총신이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말씀, 로마서에서 정치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있다.


둘째, 교리, 신조, 신앙고백이다. 교회사 가운데 교회가 성경을 100% 받아들인 것은, 100% 순종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수정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교리, 신조, 신앙고백이다. 바르트는 교회는 1차적으로는 성서이지만 2차적으로는 교리, 신조, 신앙고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르트는 어떤 교의나 고백문도 검증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근원적으로 측정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53).


셋째, 공동체도 신학의 역사에 속한다. 어제의 조상들이 발하는 음성을 특별히 주의해서 듣고, 그중 좋은 것을 택해서(54) 다음 세대에 전하면 훌륭한 신학이 되는 것이다.


성령에 대하여, 바르트는 성령에 대해 무전제성의 문제라고 한다(56). 예수의 인격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는 말이 맞는가? 사람들은 이것이 왜 진리냐고 물을 것이다.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르낙은 이러한 진술은 근거나 토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추천하고 싶은 단어는 ‘멜기세덱’이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는 것”, 즉 신적인 것이다. 거꾸로 말해 근거가 있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승리자이시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해 그 근거를 물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은 외적 혹은 내적 보증의 전제들을 포기하는 것이다(58).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그 권능이 우리 자신에 의해 전제되는 권능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총신). 또한 신학 자체에 대해서 전제되는 권능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감신).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그 규칙을 내가 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신학의 근본행위, 즉 순종이다.


앞서 말한 계시, 최초의 증인들, 성서, 공동체는 오직 신학적으로만 보증될 수 있으며 오직 신학적 내용으로만 주장되고 이해될 수 있다(57). 외부로부터의 근거는 없다. 신학이 엄격한 학문성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르낙의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확인하려는 시도, 그것은 기계적 신을 만드는 것이다. 이래 놓고 성령이 올 것이라고 하면 이는 이율배반이다.


(추가: 원래 기계적 신이라는 표현 옆에 괄호를 하고 'Deus ex machina'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용어 사용으로 삭제하였습니다. 흔히 '기계장치로서의 신'이라고 사용하는 Deus ex machina라는 용어는 그리스 비극에서 기원한 용어로 "어떠한 갈등을 갑작스럽게 종결짓기 위해서 사용하는 장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바르트가 믿음의 무전제성을 설명하면서 쓴 다음 문장에 나오는 deus ex machina와 신준호 선생님의 강연 내용을 섞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명제들의 무전제성을 인정해야 한다. (중략) 이 난제를 우리는 간과할 수 없고, 가볍게 취급할 수도 없다. 또 어떤 논증을 통해서 더 나아가 어떤 기계적인 신(deus ex machina)을 도입해 그 난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107). 강연에서 사용하는 '기계적 신'이라는 말은 '근거가 있는, 인과 관계로 설명되는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용어 이해에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해당 사항을 지적해 주신 Internatinal Theological Seminary의 김재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복있는사람



책 2-4강을 ‘중심 옮기기’라고 생각해 보았다. 성서의 확실성(총신)이나 학문적 확실성(감신)은 ‘나의 확실성, 나 중심’이라는 점에서 같다. 인간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일생의 노력이었다. 계몽주의적 확실성을 부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진리에 속한 자가 되어야 대답할 수 있다. 제자가 되어야 스스로 증명된다. 공동체 안에서는 자명한 진리다. 물론 의심, 고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는 이렇게 확인할 수밖에 없다.


성령 없는 신학은 어떠한 경우인가. 첫째, 때때로 성령을 언급하기는 하는데 자신을 두려움 없이, 아무런 유보 없이 내맡기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65). 신학은 역사화 혹은 신학화 혹은 합리주의적 혹은 낭만주의적 혹은 교의학적으로 되면서 제자리를 빙빙 돈다(65). 둘째, 자기가 영의 생명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명제를 붙들고 있으면서 성경을 붙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성서무오설이라는 명제를 잡고 있다고 해서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붙잡는다는 것은 ‘오소서 창조자 성령이시여’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진리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매일 기도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제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믿음 역시 성령과 비슷하다. 명제들의 무전제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창조세계, 우리의 존재가 그렇다. 시작과 끝을 모른다. 최초의 증인과 우리는 구분된다. 하지만 믿음의 가치는 동일하다. 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인과’라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에 생긴 땅의 논리에 불과하다. 말씀의 비밀은 자유로운 영의 비밀이다.


잘못된 믿음은 무엇인가. 첫째, 어떤 확실한 인간적 지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확률값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둘째, 맹목적 신앙 역시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질문으로부터의 태만한 도피다(109). 셋째, 믿음을 실현하려는 것, 직접 체험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힌두교적인 믿음이지만 그리스도교적 믿음은 아니다(110). 넷째, 믿음은 중요하지만 믿음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치 간접 데카르트주의와 같다.


그렇다면 진짜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언제나 새롭게 사건으로 발생한다. ‘믿어야 한다’는 식의 자기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에 의해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believe in) 믿는 것이다(115). 진리 안에 있어야 믿는 것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알 수 없다. 다른 학문적 기초는 없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도 죽음을 건너가고, 이 편과 저 편이 이어지면서 우리의 현실이 가상이 아니라 참된 현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신학의 자세


아, 이 사람 참 완고하다. 그런데 매력 있다. 강연을 듣기 전에 가졌던 바르트에 대한 관심은 주로 계시관이었다. 이전까지 바르트에 대해 들어온 것이 이와 관련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트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의 자세’였다. 개신교 신학이 듣고 응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내가 증인들로부터 들은 것을 바로 전하는 증인인지를 계속해서 묻는 진리 질문, 또한 이러한 신학은 기본적으로 ‘무전제성’을 가진다는 것. “너는 근원적으로 왜 믿냐” 하고 스스로 물었던 질문에 “나도 모르겠어요. 믿음을 어찌어찌 표현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왜 믿었냐고 하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내용을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견이지만, 바르트의 책은 직접 읽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강연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신준호 선생님의 정리는 바르트에 관한 몇 가지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면서 독자가 바르트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직접 책으로 만나야 한다. 바르트의 글은 굉장히 무겁다. 대체 이 사람은 펜을 들고 이 글을 쓰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강연은 귀로 들려 온다. 하지만 책은 내가 읽어야 한다. 강연은 지나가면 바로 다른 내용이 들리게 된다. 하지만 책은 내가 읽고, 생각하고, 다시 읽으며 내용을 곱씹을 수 있다. 여기서 오는 묵직함이 만만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강연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신학의 또 다른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도달할 수 없는 분, 신학은 그분이 하신 말씀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바르트는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에 아주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 신학 입문』 7강 “당황”에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진리 질문 안에서의 신학자의 자세와 과제를 말하고 있지만 7강 전체에 걸쳐 바르트의 논지와 더불어 내가 생각했던 문구는 다음과 같이 그가 사용한 단어들이었다. 오늘, 인간, 이웃, 역사, 환경,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오늘의 문제, 신문, 불의, 전쟁, 냉전,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공산주의, 반공산주의, 우유 산업, 시계 산업, 관광 사업, 여성의 투표권, 원자폭탄, 국가교회, 자유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가톨릭교회, 예정, 칭의, 성화, 소명, 기도, 기쁨, 고통, 관계, 기회, 능력, 계발, 돈, 재물, 이성, 부모, 자녀, 주변 세계, 관습, 악습 등. 바르트의 사유의 지평은 아주 넓다. 바르트에게 있어 은혜의 시대에 중심적인 것, 들려지는 것은 “영원하지만 시간적인, 천상적이지만 지상적인, 다가오지만 이미 현재적인 재앙과 구원”이다(88). 종말론적이면서도 현실을 무조건 도외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욱 파고든다. 막무가내로 파국을 선언하려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민감해 보이고, 고민이 많아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르트에 대하여 “계시 실증주의자”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의 신학 틀 안에서 바르트를 재려다 보니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하지만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읽어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정승훈 선생님은 2008년도에 출간된 『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에서 “지금까지 바르트 연구에서 가장 취약했던 점은 그의 비정규적 교의학이 자펜빌 시대에서부터 마지막 화해론에 이르기까지 바르트의 세계 개방성의 구조에 결정적인 것임을 간과해 버린 데 있다”고 지적한다(『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 230쪽). 아울러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을 통해 오직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세계의 이원화만을 도출하는 것에 대하여 “바르트의 원전과 신학의 시대적 콘텍스트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상게서, 258쪽). 정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말은 바르트 신학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바르트는 그의 교의학 안에 역사 사회적인 문제들을 통합시켰고, 사회적 개념의 내재성을 유용화했다”(상게서, 346쪽). 물론 여기에 주의사항도 붙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순수 신학적-교의학적 개념을 사회분석과 상황과는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갖다 붙이는 교조적-규범적인 태도가 아니다”(상게서, 346쪽).



바르트의 삶과 『교회 교의학』


에버하르트 부쉬가 쓴 바르트의 전기(『칼 바르트』, 복있는사람 역간)를 읽고 있다. 한 사람의 신학을 삶과 더불어 파악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게다가 시대도 그간 읽어왔던 사람들(루터, 칼빈, 오웬 등)보다 가까워서 현실에 대한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도 많아 보인다. 전쟁, 근대와 탈근대, 세속화된 시대에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 등. 자펜빌 시절, 괴팅겐 시절, 키르쉬바움과의 관계, 전쟁 중 독일의 상황, 전쟁 후 세속의 시대이자 냉전의 시대 등 개인적이고도 세계사적인 흐름 내에서 바르트 신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따라서 바르트의 전기와 더불어 또 읽고 싶은 책은 그의 『교회 교의학』이다. ‘교의학 안에 역사 사회적인 문제를 통합시켰다’는 정 선생님의 말이 완전히 매력적이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써내려가면서 자신의 진술 안에 역사 사회적인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바르트를 계시 실증주의자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끌린다. 교의(dogma)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생각했을 때 ‘시대를 담은 교의’라는 말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큰일이 나 버렸다. 이제 바르트는 단지 4주 간 만날 사람이 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지난 글에서 설정했던 과제를 찾기 위해 그의 『교회 교의학』을 읽어야 하다니. 그래도 괜찮다. 멜기세덱과 같은 믿음, 절대적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어떻게 삶을 담은 교의의 표현으로 나타났을까. 즐거운 여정이 되었으면. 어차피 이건 하루 이틀로 될 수가 없으니, 일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 수강부터 즐겁게 마치자.





설요한  /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신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과 미래 걱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독교 읽기’를 취미로 삼아 버렸다. 
덕분에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고민은 갖지만 차마 사회에 뛰어들지는 못하는 실천적 이원론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민하는 중에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