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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어느 칼빈주의자(?)의 바르트 학원 수강기 ③


칼 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 강연(3/4강) 후기 


※ 이 글은 2014년 12월 22일의 <현대기독연구원>이 주최했던 <개신교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 세 번째 강의에 대한 설요한 기획/편집위원의 글입니다. 세미나에 맞춰 총 4회에 걸쳐 후기 글을 <광장, 청춘>에 게재합니다. 



칼 바르트



Problem


한 달만에 다시 글을 쓴다. 지난 한 달 사이에 바르트에 대한 어떠한 글도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쓰는 내용이 나와 맞지 않다는 느낌.


강연을 들으며 아주 열심히 바르트를 읽으리라 생각했다. ‘아, 그의 삶도 알아야 해.’ ‘아, 미처 내가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을 거야. 2차 문헌도 보자.’ 한,두 권씩 쌓여가는 책들. 꾸역꾸역 읽어나가는 모습. ‘역시! 바르트도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군!’ 뇌에 들어오는 자극은 기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을 바르트도 생각하다니. 아주 잠깐 ‘신학이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뿔싸! 나는 왜 이 사람의 책을 읽고 있지... 바르트와 친해지기 위해서?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는 이 위화감. 잠시 바르트에 대한 모든 책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순간 다가오는 깨달음. ‘아, 고작 글을 만들기 위해 책을 읽었구나. 헛 읽었다.’ 이제 다시 바르트를 펴고 읽는다. 눈에 들어오는 문장.


“신학 작업은 또 다른 경우에 심판 아래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인간적 허영심이 신학을 추진하는 과정에 거의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다”  (칼 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 152쪽).


늘 이 위험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빨려들어가는 늪, 허영심. “누가 제일 큰 자인가? 누가 가장 큰 매력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이끄는가?”(앞의 책, 152쪽). 바르트가 염두에 두고 있던 허영심은 아닐지 모르나,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나.


나는 왜 이 책, 저 책에 관심이 있는가. 마음을 추스르고, 지난 강연의 3강을 떠올린다.



세 번째 강의: 신학의 위기와 희망


이번 강연의 전반부에서 ‘신학의 위기-신학의 희망’ 구도로 설명하고 후반부에서 신학의 위기의 내용인 고독, 의심, 시험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전반부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신학을 하면서 생기는 어두운 부분, 즉 고독, 의심, 시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것을 처리할 줄 알아야 신학, 목회를 할 수 있다. 고독, 의심, 시험을 이것을 처리하는가. 희망이라는 곳으로 길을 터 주어야 한다. 롬 4:18, 롬 6:8. 이 두 구절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고독, 의심, 시험)에 희망했다. 어떤 소망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신학적 고독, 의심, 시험의 상황이다. 무언가가 남아 있으면 아직 신학적 고독, 의심, 시험의 상황이 아니다. 부딪혔을 때 놀라선 안 된다. 여기서 희망이 생긴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곳에서 생긴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절망을 통과해야 희망으로 갈 수 있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여기서 참된 희망이 생긴다. (신학도 마찬가지로) 고난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자는 영혼이 병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찾고, 치료하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신학이 시작된다. 신학은 아주 비상한 논리를 가지고 계산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장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오셨다. 신학의 시작점에서 이것을 알아야 건강한 신학을 할 수 있다.


믿음은 희망과 연결되고 이 희망은 밖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다. 내가 믿든지 안 믿는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다만 내가 믿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믿을 만한 환경이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믿음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자만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 달라’는 말이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나온다. 고난, 십자가가 없이는 희망이 생성될 수 없다. 종말에 대한 희망과 결합된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다. 고독, 의심, 시험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때 내 힘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내적인 추진력으로부터 견딘다. 비로소 고난을 세상의 고난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이것이 희망의 힘이다. 이 책 전체에서 이 단원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morgueFile.com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의 지식과 행위는 침몰한다”(『개신교신학 입문』, 167쪽). 신학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만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 부활 후 40일의 사건 앞에서 모든 인간의 지식은 침몰한다. 죽음에서 부활한 그 인격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부활하셨다. “아담은 범죄자로 표식되고 벌거벗겨지고 유지판결을 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앞의 책, 167쪽). 고독, 의심, 시험은 이미 예수의 인격 안에서, 예수의 운명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인식이라면, 그것은 골고다에서 실행된 심판의 그늘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앞의 책, 167쪽).


고독, 의심, 시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나의 십자가는 그분의 것에 비교한다면 겸허한 곤경에 불과하다”(앞의 책, 168쪽). “아니오 아래 깊이 은혜된 예”(앞의 책, 168쪽)는 바르트 신학의 전부를 관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 의심, 시험을 통해 잠시 후에 맞이할 죽음을 미리 맛본다. 하지만 그 뿌리는 이미 끝났다. 깊이 은폐된 예는 부활이고 이것은 죽음의 뿌리를 절단한다.


어떻게 뿌리가 끊어졌는가? “자신이 심판당해야 할 자리에 내려가시고 심판당해야 할 자가 심판자의 자리에 섰다”(앞의 책, 168쪽). 심판자가 심판당했다. “이것은 비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며, 다 나아가 새 창조다”(앞의 책, 168쪽). 바랄 수 없는 중에 생기는 희망이 새 창조다.


로마서 6:8은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첫째의 죽음이 발생하고 또한 둘째 부활이 발생한다. (정리 끝)



좀 더 읽기, 엉뚱하게 읽기


요즘 관심 있는 주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신학에 대한 책으로 이 책을 읽고 있지만, 그럼에도 3부를 읽으며 바르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넓고 붐비는 밝은 거리를 거닐도록 두어라!”(앞의 책, 121쪽). 바르트가 신학자의 고독을 설명하기 인용한 이 노발리스의 옛 찬송가 가사는 마치 바르트가 누군가를 향해 외치는 것으로 들린다. “놀람, 당황, 의무를 경험하면서도 넓은 복도에서, 그것도 공동체 안의 복도에서, 가장 힘든 것은 너무도 많은 동료 신학자들 사이에서 혼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앞의 책, 127쪽). ‘동료 신학자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표현은 경험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표현이다.


바르트는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신학과 연결짓는 작업을 전혀 선호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신학자가 자신의 작업이 통속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바르트가 보기에) 신학을 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심리학, 역사주의, 인류학, 존재론, 언어학에 주저앉아 버리는 저 흐름에 역행해야 한다(앞의 책, 130쪽). 그리고 그 고독은 오롯이 견뎌야 한다.


왜 바르트가 그렇게 전투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졌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바르트가 보기에 신학은 단순한 문자주의도 아니고, 신개신교주의(자유주의)도 아니고, 순진한 경건주의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요, 교회사요, 교의학이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는 실천적 개념을 취급하는 윤리학이기도 하다(앞의 책, 130쪽).


그런데 여기서 엉뚱하게도 나는 바르트가 말하는 ‘고독’을 내 상황에 맞추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딛고 있는 곳에서 바르트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보수적인 환경에 서 있는 내게 바르트를 읽는 것은 자칫 ‘위험한 신학에 발을 담그는 짓을 한다’는 시선을 받기 쉬운 행동이다. 또한 바르트가 말하는 믿음, 놀람, 당황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는 또다른 (역사와 철학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보기에는 너무 순진한 신앙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하는데 실은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누군가의 시선과 기호에 맞추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신앙인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실은 바르트에 대해 일견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마음 한편에서 솟아오른다. 이 사람은 터툴리안인가.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과연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과 신앙의 정서가 실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기에 공감하면서도, 바르트가 염두에 두는, 특히 대놓고 저격하는 틸리히(Paul Tillich)의 책을 뒤적여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쨌든, 바르트의 ‘고독’은 신학자가 정말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을 하게 될 때에 만나는 고독이지만, 나는 그것을 ‘정말 자신의 소리를 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고독’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싶다.



솔직하게


바르트가 11장, 의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제기하는 몇 가지 내용은 참 와닿지만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내기 어렵다. 바르트가 제기하는 의심의 두 가지 국면은 다음과 같다.


1) 진리 질문: 계속 진리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신학은 계시의 내용을 질문해야 하고, 그 내용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들의 의미를 계속 새롭게 탐구해야 하며, 그 내용의 진리와 현실성을 언제나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앞의 책, 133쪽).

2) 신학의 대상에 대하여: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존재, 사역, 말씀하시는가. 성령의 내적 증거가 정말 있는가. 그 증거는 정말 우리로 하여금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 사역, 말씀을 확신하도록 만드는가”(앞의 책, 135쪽).


그리고 바르트가 제기하는 의심의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사역, 말씀과 경쟁하는 권세 및 권력들(예컨대 자본 등의 힘). 둘째, 신학자를 둘러싼 공동체의 형태와 선포의 취약, 분열, 왜곡(예컨대 타락한 교회의 모습). 셋째, 신학자의 내적, 외적 생활 태도가 지닌 구성적 결함(앞의 책, 137-141쪽).


나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내가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혹은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바르트의 문제제기는 내가 항상 고민하고 있는 두 가지와 맞닿아 있다. 어디 가서, 누구 앞에서도 ‘나는 하나님 믿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하고 말할 수 있고, 또 말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내가 이해한 것과 믿는 것 사이에 괴리된 것 같은 무언가가 쿡쿡 찌르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쉽사리 털어 놓기는 어렵다.


좀 더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은 바르트가 의심의 이유로 제기하는 세 가지다. 특히 나로서는 첫째, 둘째 이유와 셋째 이유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를 드러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문제요(자본주의는 실제로 큰 문제다), 국가가 문제요(국가도 실은 큰 문제다), 우리의 교단이 문제요(교단도 큰 문제다), 우리 교회가 문제요(교회도 고쳐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실은 가장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 단순히 ‘내 탓이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문제의식은 머릿속으로만 가지고 있음, 입과 손으로만 말함, 나를 내어놓지 않음, 더 약한 사람에게 참여하여 그의 밑에서 서 있지 않음, 내가 필요한 방식으로 고민을 제기함, 내가 편한 방식으로 참여함. “그는 다만 어떤 경계선 안에서만 그 믿음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앞의 책, 140쪽). 앎, 이해의 열의로만 보면 나는 열심히 믿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신앙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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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


또 엉뚱하게도, 문득 신앙인이라는 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의 자리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닌지.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공간은 실은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바르트는 신학 위기 전체를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고민은 신학과 삶의 괴리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아마 나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너무 하늘에서 놀고 있었다. 땅의 일을 다루면서도 하늘에 있기를 좋아했고 실제로 하늘에만 있었다. 위선자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7-40).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글을 쓰는 동안 내 삶의 ‘작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작은 자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인 윤리적 명령은 애써 떠올리기 싫어하는 건 아닌지. 아직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바르트가 제기하는 시험의 세 가지 상황이 무엇인가. “신적 로고스를 신학적 유비 안에 감금하는 것”(앞의 책, 151쪽)이며, “온갖 종류의 인간적 허영심을 가지고, 누가 제일 큰가”(앞의 책, 152쪽) 하고 재는 것이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 사이의 구체적 상황을 놓치는”(앞의 책, 154쪽), 즉 현실에서 괴리된 것이다. 바르트가 이러한 내용을 제시할 때 그의 주위를 둘러싼 구체적인 정황이 있을 것이다. 그 정황이 어렴풋이 이해가 되면서도, 바르트가 언급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바로 내 삶의 문제로 가지고 오게 된다. 이해하지 못한 채 개념의 장벽을 쌓는 일, 허영심, 현실과의 괴리. 이러한 것이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한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담력,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자기 비움, 이웃에 대한 관대함, 사랑, 참여.


가톨릭 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의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Jesus the Gift of Love)은 역서 제목처럼 아름다운 책이다. 바니에가 설명하는 예수님은 긍휼(compassion)의 예수님이다. “배척당하고 버림받고 짓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로워하시는” 분이시다(『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 59쪽). “당신의 길이 사람들과의 사귐에 있고, 그것이 각 사람에게 자기를 열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는” 분이시다(앞의 책, 81쪽).


바르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 후 40일의 예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자의 희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먼저 죽는 것이다. 되게 멋있는 말이다. 하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다. 바니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라르슈에서 지체장애인들과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신앙을 인생으로 증명한 사람의 말을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사랑이 거절당할 때 돌아서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잠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다.

예수는 거절당함의 마지막 수렁을 받아들이셨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저주받은 자가 되어,

바로 그 수렁 속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끌어들이셨다.

종교 지도자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으면서 그분은

이 땅의 모든 저주받은 자들에게 하느님을 끌어들였다.

종교의 하느님에게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 앞에 당신을 내어놓으신 것이다.”

- 장 바니에,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이현주 옮김), 244쪽. 




설요한  /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신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과 미래 걱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독교 읽기’를 취미로 삼아 버렸다. 
덕분에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고민은 갖지만 차마 사회에 뛰어들지는 못하는 실천적 이원론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민하는 중에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