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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답 없는 교회에 대한 답 없는 증언, 하지만 그것이 답이다.


답 없는 교회에 대한 답 없는 증언, 하지만 그것이 답이다.

: [서평]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포이에마)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 / 양희송 / 포이에마


답이 없는 세상. 우리는 답이 없는 채 그냥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답 없는 세상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답이다. 이러한 세상의 문제는 세상 속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답없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도 여전하다. 우리는 이미 오신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지만, 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답 없는 세상의 모습 그 자체를 똑같이 닮았다. 이른바 ‘답이 없는 교회’, 그 자체가 ‘답이 없는 세상’의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아이러니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하지만 때로는 ‘답이 없는 교회’의 ‘답없음’의 현실이 극에 달할 때가 있다. 초대교회 당시의 문제가 그랬다. 로마교회, 갈라디아교회의 문제기도 했다. 또한 종교개혁 시기의 문제기도 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종종 있었다. 그때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다. 이른바 ‘무엇이 진짜 교회인가?’라는 논쟁. 다른 말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논쟁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할례와 율법 아래를 살고 있는 유대인이 아닌, 믿음 아래에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시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종교제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 앞에 믿음으로 선 사람들을 ‘교회’로 제시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할례와 율법 아래를 살고 있는 유대인이 아닌, 믿음 아래에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시했다."


양희송의 책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그런 책이다. ‘답이 없는 교회’의 ‘답없음’의 현실이 극에 달한 지점, 그 지점에서 로마서처럼, 갈라디아서처럼, 또한 루터처럼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 혹은 ‘무엇이 진짜 교회인가?’라고 질문하는 책이다. 반대로 접근해보면 그만큼 ‘답이 없는 교회’의 ‘답없음’의 현실이 극에 달했다는 경고메시지기도 하다.


양희송의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증언, 그리고 가나안성도를 자청하는 자들의 증언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마치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진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시하듯이, 양희송은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빌어서 ‘제도적 교회’ 밖의 가능성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한다. ‘네가 다니는 교회는 교회 맞어?’


‘네가 다니는 교회는 교회 맞어?’라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힘들다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은 ‘그러면 교회가 뭔데?’라는 질문일 테다. 마지막 3부는 이 질문에 대한 양희송의 고유한 고민이 담겨있다.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나름의 논의를 인용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다니는 교회만이 교회일 수는 없어’라고.


사실상 핵심 노른자는 마지막 챕터 ‘진격의 가나안’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이라는 진격의 거인이 진입해오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교회는 한 겹, 두 겹, 세 겹의 성벽을 쌓고 그러한 현상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한 겹 뒤에는, 두 겹 뒤에는, 세 겹 뒤에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능히 방어할만한 최후의 교회, 아름다운 교회가 존재한다고 맹신한다. 하지만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담고 있는 통찰처럼, 결국 외부의 ‘거인’은 타자가 아닌 우리 자신의 변형된 모습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한 겹, 두 겹, 세 겹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벽 밖으로, ‘거인’에게로 직면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성벽 밖으로, ‘가나안 성도 현상’이라는 거인에게로 나아간 이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로’하는데 주안점이 맞춰져있다. 그리고는 성벽 뒤로 숨는 이들을 향해 ‘함께 직면하자’고 말하는데 있다. 이는 ‘대안’이 아니다. 위험에 대한 경고조치다. ‘답이 없는 교회’의 ‘답없음’이 극에 달했다는. 아니, 어쩌면 이는 그 어떤 조악한 ‘대안들’보다 더 값진 ‘대안’일 테다. 진정한 ‘대안’은 사변적인 논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변혁하는 삶의 실천 속에 있을 테니. 그의 증언을 들은 우리들은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가나안 성도 현상’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다. 또한 본 현상이 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혹자는 이러한 책을 보고 ‘제도적 교회’의 필요성을 강변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논리로. 재미있게도 그 어떤 ‘제도’조차 ‘죄인’에게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임은 잊었나보다. 그리고 올바른 ‘제도적 교회’가 많아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더 좋은 대답이라고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아’라는 유아적 발상이거나, 혹은 양희송의 논지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오독의 발현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인용된 수많은 가나안성도들의 ‘증언’을 공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공감능력상실증’에 걸린 ‘답이 없는 교회’의 ‘답 없음’을 방증해주는 발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나안 성도 현상’이라는 진격의 거인이 몰려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시끌벅적하다.


‘가나안 성도 현상’이라는 진격의 거인이 몰려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시끌벅적하다. 누군가는 새로운 사역지가 생겼다고 열광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고 열폭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희송은 그 현상 속에 김교신이 있음을, 밀턴이 있음을,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있음을 본다(175-182).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결국 ‘답없는 교회’를 깨웠음을 은밀히 암시한다. 우리 또한 저 현상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들 속에 숨어있는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을 바라보자. 그리고는 조용히 진격의 거인이 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번 믿어보자. 그리고 함께 저 현상 가운데로 나아가보자. 조용히, 하지만 담담하게. 용기를 갖고 말이다.


우리는 ‘성벽 안의 신앙’이 아니라 ‘성벽 바깥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가나안 현상에서 읽어내고자 했고, 그것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이 고민에서 우리는 교회를 다시 읽어내고, 다시 시도해볼 통찰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틀에 박힌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상상력의 방향을 전폭적으로 달리하고, 전혀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184).





홍동우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입학 예정. 

일단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람인지, 

세상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사람인지, 

혹은 온갖 경계선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경계인'이라는 사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