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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 가운데

가나안 교역자를 생각한다


ⓒpixabay


시작하며

드디어 교회에 새로이 부임하게 될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이제 막 시작됩니다. 청년부 담당 전도사로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스무 명의 청년들과 함께 사역하면서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0년 동안 교회를 붙들고 내려오지 않으셨던 노년의 담임 목사님이 이제 은퇴하시고, 젊고 열정 있는 목사님이 새로 부임되어 처음 오시는 날이었으니 말입니다. 부모 세대와의 갈등, 전혀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설교, 기성세대의 문화로 충만한 기존의 교회 분위기에서 청년들이 여기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다행인 셈입니다. 


제발 청년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성경의 교리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붙드셔서 설교가 살아있게 해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설교가 진행됩니다. 부모 세대들의 우렁찬 아멘 소리가 전보다 훨씬 더 커졌습니다. 


아...너무나 허탈했습니다. 기복 신앙으로 40분이 꽉 찬 설교가 울려 퍼졌습니다. 충성하면 복 받고 헌금 하면 복 받고,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게 하나님 뜻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봉독을 위해 펴 놓은 성경책은 그 이후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허망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교회 청년들에게 복음을 허락하지 않으시는지, 반성경적인 설교를 전하고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담임 목회자 아래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일개 전도사로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청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어떻게든 해보려 했던 노력은 안 보신건지 따져 물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 드렸는데, 그걸 그렇게 묵살하시다니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목이 메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다함께 기도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마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은 젊은 전도사가 은혜 받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몇 개월 후 저는 그 교회에서 사임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청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면 마음이 쓰라립니다. 벌써 몇 년이 훌쩍 지난 일입니다.


한국교회 장그래의 미생 이야기

지금부터 제가 꺼내려는 작은 이야기는 자전적 경험을 동반하는 개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분의 입장에 따라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냈지만 여러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미생의 삶을 살고 있는 30대 초반 젊은이의 치기어린 글이니 다양한 반응은 당연할 것입니다. 미완의 글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조심스럽게 예측하건대, 저처럼 이런저런 모습으로 제도적 교회에서의 절망을 경험한 분들에게는 위로와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성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하고 탁월한 논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관점에서 바라본 관찰이 담겨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가나안의 출현

그 이야기는 바로 ‘가나안 성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관점을 조금 바꿔서 ‘가나안 교역자’라는 주제로 풀어보려 합니다. ‘가나안’이라는 말은 교회를 “안 나가”는 표현을 거꾸로 기술한 것으로서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신앙을 유지해나가는 성도’ 정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얼마 전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양희송 지음, 포이에마)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가나안 성도가 신조어로서 조금 더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책이 화두를 던진 셈이지요.


출간 이후 SNS를 중심으로 여러 논의가 몇 차례 오고 갔는데 제가 보기에 주로 가나안 성도의 신앙은 가능한지에 관해 논의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지역교회를 출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가능성”에 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 논지는 위 책의 저자가 제기한 매우 급진적인 문제제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만을 다루는 것으로는 가나안 성도 출현에 관련된 복잡한 문제의 본질에까지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오로지 개인 신앙의 관점에서 논의를 시작하게 되면 과도한 신학적 교리(구원론, 교회론) 논쟁으로 흐르게 될 여지가 생기고, 그러면 현실의 교회 문제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다수 가나안 성도는 앞으로 평생 지역교회 없이도 가능한 신앙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만한 교회가 없기 때문에 교회 밖 신앙을 찾아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말 그대로 ‘교회 밖 신앙’에 관한 논의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나안 성도 출현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원인을 좀 더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그들을 계속 양성해내는 제도적 교회를 제대로 진단해보는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야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의 신앙과 교회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제도적 교회 자체에 완전히 질려버린 사람들에게 그저 현재 그대로의 교회 안 신앙 이야기를 무턱대고 꺼내는 것은 오히려 아픈 데를 다시 건드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pixabay


‘가나안 성도’라는 용어, 꼭 필요해?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 자체에 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글은 제목부터가 피로와 짜증을 유발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나안 현상을 일단 들여다보기도 전에 제도적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신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무조건 강력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입장은 차치하고라도(사실 이렇게 주장하는 진영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게 이 글의 요지입니다만),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그 많은 성도들의 교회 탈출기를 가나안 성도라는 단편적 용어에 구겨 넣는 것은 아닌지, 가나안 성도 100만 시대라는 수치는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닌지 등등의 비판적 시각도 엄연히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불편함은 누군가 선구적으로 던지는 거대담론이 등장할 때면 항상 일어나는 반응은 아닐까요? 기실 우리 모두가 발설하는 모든 언어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일단 광장에 화두가 던져졌으므로 여러 선입견은 잠시 내려놓고 그 용어를 따라 들어가 한국교회의 단면을 살펴보는 기회로 삼는 건 어떨까요? 비판은 그 이후에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가나안 교역자가 가나안 성도를 낳았으니

그렇다면, 저는 이 글을 왜 쓰는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제가 가나안 성도, 아니 가나안 교역자였기 때문입니다.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사역을 쉬면서 몇몇 교회에 출석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얼마간 실제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던 동안에 저는 가나안 교역자였습니다. 아니 그 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신학생이자 전도사가 가나안 성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질리다 못해 탈진상태에 이르러 한동안은 깊은 회의감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목양하고 따를 길을 몸소 보여야 할 교역자가 가나안 성도가 되는 현실이구나.’라고요. 그러면서 주변의 동료들과 선후배 교역자들의 탄식과 절망 가득한 소리를 주고받으며 단지 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성도 출현 이전에 가나안 교역자의 출현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한국교회는 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본래 가나안 성도 안에 가나안 교역자도 포함된 것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교역자의 관점에서 논의를 짚을 때 가나안 성도들의 교회 탈출 현상을 좀 더 명확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부터 논의를 시작하면 개인의 관점에서만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도 짚을 수 있게 됩니다.


보통 가나안 성도를 다루면 특히 전통적인 제도 교회에 충실한 목회자 진영에서는 소수 개별 신자들의 일탈이나 잠시 지나가는 유행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스러운 사상을 추구하는 무리로 뭉뚱그려 경계하거나 혹은 별 신경 쓰지 않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원인을 제공한 제도적 교회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보지 않은 채 오로지 가나안 성도의 비공동체적 신앙의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양쪽의 이러한 반응은 좁혀질 수 없는 것일까요? 무조건 신학적 논쟁과 양극화 현상으로만 해결해야 할까요? 당분간은 그래야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양자 간의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해 공통의 전제를 발견함으로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화해’란 결코 말랑말랑한 뜻이 아니라 양쪽이 연합하여 대항해야 할 거대하고 엄청난 악을 발견하는 데서 밀려오는 ‘공동의 좌절감’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가나안 교역자를 중심으로 현상을 바라볼 때 새로이 관찰되는 면면이 있습니다. 제도적 교회의 교역자가 가나안 성도 이전에 가나안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한국교회 목회자 양성 시스템의 처절한 실패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교역자의 등장은 제도적 교회의 핵심을 형성하는 주류 목회자 진영 내부에 거대한 붕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게 됩니다. 교회에 실망해 떠나간 가나안 성도를 향하던 비판의 화살이 제도권 목회자 진영에게 우선적으로 향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가나안 성도는 가나안 교역자를 양성해내는 시스템과 그 주도자들-그리고 암묵적 동조자들-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데로 논의의 관점을 바꾸고, 제도교회 시스템과 목회자 진영의 그득한 문제부터 속속들이 따져볼 수 있게 됩니다. 가나안 성도와 가나안 교역자는 제도적 교회 시스템과 주류 목회자 진영의 피해자이며, 가나안 교역자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나안 성도 또한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국사 > 한국교회사

한국교회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두어야 할 점이 바로 ‘한국사회 안에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살면서 오로지 기독교 문화 안에서만 살아온 모태신앙적 신자들은 교회를 마치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만 임하는 구별된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와 반대입니다. 한국교회는 우리 한국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형성한 사회/문화의 영향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적으로 완벽한 제도적 장치들을 가득 채워 넣는다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명암이 고스란히 교회 안에도 들어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한국인들의 교회니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속된 세상 문화로부터 순결히 구별된 공간이라고 교회를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인 ‘가현설 교회론’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각 시대의 사람들은 그 당시 사회와 문화를 옷 입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교회를 이야기 할 때는 당연히 한국사회와 겹친 상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부패하고 무능한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고스란히 모아놓은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한국사의 수많은 부정적 모습들과 때로 정치적 부패 세력들과 결탁하고 손잡고 있는 한국교회사의 뒤안길을 전제해야 합니다.


교단, 신학, 교단 신학(교)

이렇게 한국사회의 민낯을 겹쳐놓은 상태에서 한국교회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위해 두들겨 봐야 하는 두 개의 제도가 있는데 바로 ‘교단’과 ‘신학교’입니다. 교단과 신학교와 관련 없는 한국교회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단과 신학교가 합쳐진 ‘교단 신학교(혹은 교단 신학)’ 앞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단 노회제도가 있는 장로교회 뿐 아니라 한국의 제도적 교회는 모두 지역교회로서의 개별성과 함께 전체 시스템을 공유하는 보편성이 존재합니다. 그 보편성이 흘러나오는 주 기관으로서 각 신학 전통의 차이와 분리 등으로 형성된 제도를 ‘교단’이라고 지칭합니다. 모든 교회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등등). 초교파 교회도 초교파라는 교단의 문화와 시스템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지역교회는 한국교회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교단적 색체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공유합니다. 이 교단마다 각 신학교를 통해 교단별 목회자후보생을 양성합니다. 한국교회의 목회를 생각하는 목회자후보생은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을 가장 먼저 ‘교단 신학(교)’에 맞춰야 합니다. 교회 탈출 현상을 일으킨 특정 지역교회 한곳 한곳마다 사안별로 들어가 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반드시 모든 지역교회를 연결하는 심장부인 교단 신학교로 돌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교단 신학교가 무능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제도적 교회가 실패해서 지금도 가나안 교역자가 배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단 신학교에 소망이 있을까요? 신학, 교단 그리고 교단 신학교의 총체적 실패가 한국교회의 실패에 앞서 있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해 개혁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과 그들의 정통(그러나 당시에는 매우 불온했던) 신학을 교단 신학교에서 강도 높게 배우지만 정작 교단 신학교 담장 너머 현실에서는 아무런 개혁 의지도 목소리도 외치지 않는 엄청난 모순을 보면서 학생들은 점점 무뎌지게 됩니다. 교단의 눈치 보느라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하고 외쳐야 하는 현실에서 타협하는 교단 신학에 미래가 있을까요? 거기에서 미생의 상태인 목회자후보생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신학적 영지주의자들만 배출해낸 건 아닐까요? 가나안 교역자는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morguefile


낡은 사역 패러다임

대부분의 교단 신학생들은 신학대학원 목회학 과정(M.Div)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교회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듣고 보고 배운 대로 거대한 시스템을 갖춘 교회에서 사역하게 되기를 내심 바랍니다.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고, 사례비가 넉넉하고, 온갖 잡일에 시달리지 않아도 가능한 시스템을 자랑하는 교회 말입니다. 그렇게 사역의 본질은 점점 잊어버리고 시스템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인맥을 따라 살고, 더 나은 스펙을 위해 서로 과열 경쟁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이 배운 신학이 필수로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낮은 데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지가 엄청난 모순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게 됩니다.


혹자는 이렇게 비평할지 모릅니다. 매우 편안한 사역지도 많은데 사역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면만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고요. 물론 넉넉한 사례비에 편안한 사역이 가능한 곳들도 많고 그런 곳들을 이용하며 돌아다니는 사역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답변드릴 수 있겠습니다. 군대 사회에서 아무리 소위 말하는 꿀(매우 편안한)보직을 담당한다 한들, 군대가 짜놓은 폐쇄적이고 낡은 시스템 안에 있는 것만으로 모두가 피해자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역자를 제도 교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종의 일회용 톱니바퀴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역 시스템 안에서는 모두가 사역의 본질에서 점점 떠나게 되는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교역자 리바이벌'의 아이러니

이처럼 모순되고 오류 가득한 시스템은 전혀 다루지 않으면서 사역자 개개인의 열심만 주구장창 강조하는 이러한 모순은 지금도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얼마 전 동일한 제목의 책도 출간되었는데요. 어떻습니까? '부교역자 리바이벌'이란 말이 부교역자는 매우 잘못된 시스템 안에서도 맡겨진 사역과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해 단련되고 헌신하며 충성하여 더 순전한 부흥을 추구해야 한다고 읽히지는 않나요?


위와 같은 방식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연약한 젊은이들을 착취할 때 자주 써먹는 방식이니까요. 미생 장그래들을 무한 생산하는 시스템을 굳건히 갖춘 채로 실패하고 낙심하는 이들에게 포근한 위로를 제시하는 척 하면서 오로지 그들 개인의 자기계발 탓으로만 무한 책임을 돌리는 기득권의 교묘한 전략의 기독교 버전일 뿐입니다. 부교역자라는 직분의 당위 자체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을 뿐더러 ‘부’교역자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담임)’ 교역자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미생적 용어일 뿐인데, 담임 교역자와 교회 시스템의 개혁과 부흥 없이 오로지 그들의 개인적 개혁과 부흥만 말하다니요.


사회의 모순된 행위와 똑 닮은 교회의 이런 모습에 너무 오래도록 익숙한지라 문제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건강한 교회의 우정 어린 환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부교역자 사례비로는 한 가정이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게다가 담임 교역자는 넘치게 받으면서도) 그걸 당연시하는 잘못된 구조의 개혁을 전혀 다루지 않는 신학은 어느 별에서 온 걸까요? 


교리 개혁 VS 구조 개혁?

“교리를 철저히 개혁하면 구조의 개혁은 반드시 동반된다. 따라서 언제나 어디서나 교리 개혁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이와 같은 논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논리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모든 초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에 단순함에서 나오는 힘도 전달됩니다. 이 주장대로 구조 개혁은 교리 개혁의 결과물일 뿐일까요? 그러니 언제나 교리의 개혁부터 논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결함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위 논지를 입증하는 근거를 도무지 찾기 어렵다는 것이고(오히려 반대의 근거가 도처에 산재합니다), 현실 세계의 모든 사안을 지성의 측면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주지주의’의 덫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지주의’는 항상 ‘전체주의’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오로지 생각의 계몽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계몽의 내용 또한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모더니즘의 기획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양하고도 입체적일 뿐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사안들의 연대는 개혁의 필수 전제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교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종교개혁 시대 당시 첨예한 논쟁의 중점에 서 있던 ‘사제주의’는 교리와 구조가 함께 얽혀있는 사안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의 발견은 사제주의를 혁파하는 구조 개혁을 필수로 동반했습니다. 교리 개혁과 구조 개혁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어디나 사람 모이는 곳은 부패하기 마련

가나안 교역자를 양산해내는 시스템의 전력을 끊고 가동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필수로 다뤄야 할 논지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교회 시스템에 관한 ‘양비론’적 견해입니다. 예를 들면 “초대형 교회나 작은 교회나 모두 사람 모이는 곳에는 죄가 그득하기 마련”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견해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양비론적 논리로 무장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나안 교역자를 배출하는 구조의 개혁을 위한 철저한 실행을 막는 편에 서게 됩니다. 마치 끔찍한 죄악을 범한 목회자가 공적 회개와 책임 없이 여전히 파렴치한 목회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보면서도 범죄의 양비론(“당신들도 죄인이니 심판은 주께 맡기라”)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불의한 행위를 두둔하는 편에 서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구성원의 수가 교회론의 핵심 교리 중 하나라고 믿는 저와 같은 입장에서는 교회론에 관한 양비론적 견해는 대안을 모색할 수 없게 만드는 유혹의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교역자와 가나안 성도를 양산해내는 교회의 시스템 작동을 멈추려면 가장 먼저 기업 운영 방식의 교회 시스템이 종료되어야 합니다. 대형교회-그리고 동일한 시스템을 갖춘 제도 교회-가 존재하는 한 가나안 교역자는 존재할 것입니다. 대형교회가 값싼 제자도, 값싼 교제, 값싼 봉사에 물든 신자를 관리하는 한, 제도적 교회를 탈출해 바깥에서 신앙을 상상하는 성도의 수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용기 있는 가나안 교역자들

어쩌면 이 글을 가장 불편해할 분들은, 모순된 제도적 교회 안에서 신음하고 있는 양떼들 앞에 서서 버티고 있는 저와 같은 부교역자 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그 치열한 현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이이라고 믿습니다. 반대로 저는 실패자입니다. 어쩌면 도망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저를 온종일 붙잡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저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교역자들께서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신앙을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역자의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실패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다른 분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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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교역자의 자리까지 올 때에는 제도적 교회가 무탈하게 운영되도록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톱니바퀴 같은 삶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원대한 사명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뜻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을 찾아 함께 만들어가는 대안적 공동체로의 부르심에 많은 분들이 동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한걸음 내딛었던 아브라함처럼, 지금이야말로 순전한 믿음 그 자체가 필요한 시기일지 모릅니다. 재정적인 문제나 관계적인 문제를 포함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모두 주께 맡기고 다시 성도의 위치에서 시작해보며 시스템 바깥에서의 교회와 목회를 꿈꾸는 소수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시급한 한국교회일지 모릅니다.


제도권(교단) 신학자-목회자에게 권함

이제는 직설적으로 제 의견을 말씀드릴 때입니다. 가나안 교역자와 성도를 탈출시킨 건 교단 신학자, 제도권 목회자 진영입니다. 총체적 실패와 대안 운운의 책임은 가장 먼저 그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자리 잡고 있는 교단, 신학교, 교회에서 잠시만 뒤를 돌아보십시오. 밑을 내려다보십시오. 아무런 힘없이 그저 시스템을 위한 도구로 전락된 부교역자가 안 보이십니까? 가나안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을 쉽사리 정죄하거나,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모든 권위와 직제와 제도에 색안경을 쓰게 된 원인을 여러분이 제공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당장 구원이 끊길 것처럼 겁주지 마십시오. 구원을 누릴 만한 교회를 살아내고 초대하는 사람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부교역자라는 호칭이 점점 사라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교회에서 평생 책임지면 됩니다. 교회에서 담임 교역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일랑 당장 집어던지고, 모든 교역자가 함께 그려내는 공동의 목회적 비전을 세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교역자가 하던 잡일을 담임 교역자가 하면서 낮은 자의 시각을 배우십시오. 교회의 간판이 담임 교역자와 그의 설교가 되지 않고, 교회의 가장 작은 아이들이 되도록 꾸려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채용하다 능력치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계약직 사원처럼 부교역자를 다루지 마십시오.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교역자 아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부교역자 대신 신학생을, 교회 대신 신학교를 대입시켜서 교단과 신학교에도 비슷한 변화가 싹트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거룩한 상상력에 휩싸이면서도, 그저 평범하고 찌질하고 고집 센 사람들이 모이는 죄인들의 교회라는 현실도 붙들기를 바랍니다. 또한 신약성경이 증거하고 권면하는 교회의 제도적 권위와 직제들을 자신의 탐욕스러운 권위와 차별을 이용하는 근거로 써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직제와 권위는 목회자 진영의 탐욕적인 종교적 권위를 정당화하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끝까지 돌보고 가르치면서 바깥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사회적 의무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가나안 교회 상상하기

주를 따르는 제자로의 부르심은 더 확고하게 붙들게 됐지만 현재의 교단 신학교와 제도적 교회의 교역자 생활로 돌아가고픈 생각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저처럼, 지금의 교단과 제도교회, 그리고 그 기반을 굳건히 지탱하는 신학이 (그리고 절대적으로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가나안으로 떠나온 이들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오래 되었으나 새로운 교회를 제시하는 제 3의 초대에는 기꺼이 응하리라고 믿습니다. 가나안 교역자와 가나안 성도의 안식처인 가나안 교회가 도처에 세워지는 모습을 꿈꿉니다.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가나안 교회이기를 꿈꿉니다. 영원 전부터 교제하시며 존재하신 삼위 하나님을 닮아, 우리 사람도 타자와의 친밀한 교제를 사모하는 공동체적 특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에는 가나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포함될 것입니다. 


“나는 가나안 성도를 부르러 왔노니...”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으로 오신다면 가장 먼저 가나안 성도들에게로 가시지는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는 바깥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시는 분이니까요. 그래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놀면서 참된 제자도와 복음을 전해주시는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한 편으로 그분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을 종교인들은 어디가 될지도 궁금하고요.


미국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살아내고 있는 쉐인 클레어본과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가 공저한 <행동하는 기도>(Becoming the Answer Our Prayers)의 마지막에 쓰인 문장을 저도 기꺼이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절망적이고도 희망찬 현실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 자신이 대안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나안을 넘어, 그분의 나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 되자.





이승용_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후보생 과정을 밟다가 

정신차려보니 출판사에서 영업과 홍보 일을 하고 있다. 

밥상과 책상을 함께 나누는 교회공동체를 소망하며 30대를 버텨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