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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가 누구야?








로완 윌리엄스가 누구야?


[강연후기] '신비로의 초대: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을 듣고




글. 설요한  _20150901





이 글은 강연후기라기보다는 로완 윌리엄스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개글에 가깝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책은 지난 2003년에 『기독교 영성입문』(The Wound of Knowledge, 은성 역간) 이후에 올해 들어서야 두 권의 책 『신뢰하는 삶』(Tokens of Trust, 비아 역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Being Christian, 복 있는 사람 역간)이 번역되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에 대한 언론의 기사는 종종 있었고, 특별히 성공회 사제이신 주낙현 신부님께서 본인의 홈페이지(http://viamedia.or.kr/)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하셨기에 우리나라에서도 계속해서 알려져 오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공회 외 개신교권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이며,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사제입니다. 기독교 신조, 기독교 영성사, 교부 신학, 문학 등 기독교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에 관해 저술했습니다. 이렇듯 좋은 자질을 가진 학자이면서도 성공회라는 교회의 사제, 한 사람의 경건한 신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 내에서 할 수 있는 한 사회의 현안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로완 윌리엄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의 배경이나 신학에 대한 이해가 짧습니다. 올해 번역된 로완 윌리엄스의 두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느낄 수 있겠지만,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평이해 보이지만 그의 언어에는 쉽게 넘어가기는 어려운 묵직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자 합니다.


8월 10~11일 현대기독연구원 강의 : 김진혁 교수, ‘신비로의 초대: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강연


아래 정리한 로완 윌리엄스에 관한 내용은 이번 8월 10-11일 현대기독연구원에서 김진혁 교수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강연으로 진행된 ‘신비로의 초대: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 강연 내용에 의존하여 요약, 작성한 것입니다. 김진혁 교수님의 강연을 거의 내용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며 강연에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을 따로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강연 내용의 독창성(originality)은 김진혁 교수님에게 있습니다. 다만 모든 내용을 받아쓰기하듯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요약·정리하여 새로 작성한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저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한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당히 완성도 있었던 당시 강연 내용을 새로 정리하여 쓰는 와중에 중요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듭니다만, 읽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 신학? 로완 윌리엄스?


국내에 번역된 로완 윌리엄스의 책은 『기독교 영성입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뢰하는 삶』입니다. 올해 번역된 뒤의 두 권은 로완 윌리엄스의 책 가운데 쉬운 책에 속합니다. 물론 로완 윌리엄스가 구사하는 언어가 미끌미끌(slippery)하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이상의 책 세 권을 읽으면 로완 윌리엄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각기 기독교 영성사(역사), 기독교인의 실천, 기독교 신조에 관해 설명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로완 윌리엄스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영국 신학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이나 독일 신학에 비해 영국신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왔습니다. 영국은 지성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신학적 사고가 표현되는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교회적인 차원에서는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영국 특유의 신중함, 진지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국신학은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신 우리나라에는 성공회 인물이 주로 소개되어 왔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존 스토트, 톰 라이트 등은 모두 성공회에 속한 사람들로 우리나라에는 복음주의자, 복음주의 신학자 정도로 소개되어 왔습니다.



Rowan Williams 

by More Than Gold UK_ https://www.flickr.com/photos/morethangolduk/6266380641/


본격적으로 로완 윌리엄스를 다루기에 앞서, 로완 윌리엄스에 대해 도는 이야기를 세 가지 정도 다루고자 합니다.


1) 20세기에 존 스토트를 읽었다면 21세기는 로완 윌리엄스다?


이 말은 청어람 ARMC의 양희송 대표님이 로완 윌리엄스를 추천하며 하신 말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띠지에 들어가 있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의 말도 있습니다. 존 스토트와 로완 윌리엄스는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둘이 갖는 신학적 기반은 다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라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 궤적을 보시면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 전통의 정수를 끌어올려 신학을 한다?


개신교의 많은 교파가 자신의 교파를 대변하는 신학자(이를테면 루터나 칼빈)를 두고 있는 데 반해 성공회는 자신들을 대표하는 특별한 신학자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회 역사를 되짚었을 때 리처드 후커나 토머스 크랜머를 언급할 수 있지만,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1-4세기 기독교 전통을 정체성으로 삼습니다. 교회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던 역사와 신학에 둔 것입니다. 성공회는 교회의 통일성, 하나됨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다른 교단에 비해 덜 보이곤 합니다. 대신 영국 내의 (심지어 영국 너머에서까지) 여러 교단,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 신학적 틀을 만들려 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가 성공회의 위대한 유산을 끌어내서, 예컨대 「공동기도서」 등을 끌어내어 신학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 내에서 특이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박사과정 지도교수 도날드 알친이 썼던 표현대로 그는 “성공회의 형태를 지닌 정교회”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완 윌리엄스가 구사하는 신학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성공회 신학은 아닙니다.


로완 윌리엄스가 영향을 받은 다양한 신학자나 학파 등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로완 윌리엄스는 교부학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가 36세에 옥스퍼드의 레이디 마거릿 교수로 임명된 직후 『아리우스: 이단과 전통』 이라는 연구서를 출판함으로써 고전어 지식과 교부학 해석 능력을 검증받았습니다. 그리고 로완 윌리엄스의 박사학위 논문은 블라디미르 로스키라는 정교회 신학자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가톨릭에서 앙리 드 뤼박이라는 가톨릭 신학자가 쓴 Catholicism이란 책을 보고 가톨릭 신학과 교부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앙리 드 뤼박이 활동하던 시기는 교황의 영향으로 가톨릭은 교부학과 아퀴나스 연구에 대한 상당한 유산을 저장하는 시기였습니다. 특별히 로완 윌리엄스가 가톨릭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칼 라너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입니다. 또한 로완 윌리엄스는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서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르트의 기독론적 사고는 로완 윌리엄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로완 윌리엄스의 바르트 삼위일체론과 정치신학 연구는 학자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 받습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로완 윌리엄스는 비트겐슈타인과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종합하면, 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라는 통로를 통해서 다양한 지적 유산을 흡수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Rowan Williams 2007

by Southbanksteve_ https://www.flickr.com/photos/spunter/446395066/


3) 로완 윌리엄스는 논리적이지 않다?


로완 윌리엄스는 시적인 신학을 추구합니다. 시 언어의 특징은 일상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이나 존재의 뒤틀림에 대해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가 흑과 백, 곧 옳고 그름으로 분명하기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중간지대로 우리를 끌어 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Arius에서, 아리우스는 그 세계에 맞는 합리성을 추구했다고 평합니다. 그러한 합리성에 의하면 예수는 절대 성부와 동일본질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의 경우에는,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언어를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새로운 생각의 패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완 윌리엄스는 신학이 지나치게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 흐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칫하다 인간의 협소한 마음이 계시를 가두어 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긴장의 신학자


이제 본격적으로 로완 윌리엄스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긴장’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긴장을 해소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긴장 속으로 넣는 신학자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웨일스의 스완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완지는 비트겐슈타인이 1940년대 자주 여름 휴가를 보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친구 러시 리즈(Rush Rhees)가 스완지 대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와서 휴가를 보내고 스완지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사후 리즈는 유고를 모아 출간을 했는데, 그 책이 바로 『철학적 탐구』입니다. 그리고 스완지는 비트겐슈타인을 종교적 관점으로 연구하는 메카가 됩니다. 또한 스완지 대학교는 영문학으로 유명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어릴 때부터 스완지 특유의 지성적 사고에 물들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책에 반영됩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사고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많은 문학작품이 인용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로완 윌리엄스의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요인입니다. 예컨대 『신뢰하는 삶』에서 성자에 대해 설명하는 3장의 원제목은 “A man for all seasons”입니다. 직역하면 “모든 계절을 위한 인간”입니다. 이는 원래 1954년 영국 BBC 라디오를 위해 로버트 볼트가 만들었던 드라마의 제목으로, 『유토피아』를 썼던 토머스 모어 경을 일컫던 말입니다. 이 표현은 토마스 모어의 동시대인인 로버트 위팅턴이 그를 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즉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목을 알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토머스 모어의 삶이 중첩되면서 이해하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이런 식으로 신학과 문학을 함께 재료로 사용하여 신학을 전개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대학교 학부를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마쳤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좋아하긴 했지만 당시 공부하던 신학에 만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위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옥스퍼드 대학교로 가게 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옥스퍼드에서 1975년에 블라디미르 로스키의 신학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씁니다. 이때 로스키뿐 아니라 플로렌스키나 불가코프 등 러시아 신학 전반을 공부합니다. 로완 윌리엄스가 1950년생이니 이때가 우리 나이로 보면 26세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미국의 성공회 신학교인 General Theological Seminary에 가서 T. S. 엘리엇의 Four Quartets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강의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도 계속해서 1978년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치면서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주교직으로 부름을 받으면서 몬머스의 주교, 웨일스의 대주교를 거쳐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합니다. 영국 성공회에서 주교가 된다는 것은 영국 의회에 가서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표를 던진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의 실제 삶에 관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로완 윌리엄스가 이처럼 대단하다고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다양한 경험이 그의 신학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가 어떤 주제에 대해 섣불리 혹은 속 시원하게 말하는 걸 별로 보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의 폭넓은 지적 훈련과 경험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하고 고려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다양한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 연속성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일관성 있는 신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마이크 힉턴은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에 일관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개인적 영성, 곧 깊은 차원에서 개인이 가지는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에서 나오는 깊은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활동, 개인을 둘러싼 공동체가 바른 공동체여야 나의 윤리가 세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활동입니다. 실은 각 기독교 교파마다 개인적인 영성과 정치적인 활동을 연결하기 위한 다양한 체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칼빈주의 성화론, 루터의 두 왕국론, 신칼빈주의의 세계관 등이 다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 역시 개인적 영성과 정치적 활동을 함께 고민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신비에 깊이 참여함으로써 개인적으로 깊은 영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신뢰하는 삶』이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보면 영성을 현실·사회적인 문제로 연결지으려는 시도가 드러납니다.


Ludwig Wittgenstein

by Ben Richards_ Wittgenstein Archive, Cambridge



비트겐슈타인을 신학적으로 전유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로완 윌리엄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로완이 2013년도에 했던 기포드 강연이 The Edge of the Words라는 책으로 나왔을 때, 영국의 The Spectator에는 “로완 윌리엄스는 비트겐슈타인을 너무 많이 읽었다”(Rowan Williams has been reading too much Wittgenstein)라는 제목의 서평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10대 중반에 비트겐슈타인을 읽었고 이후에 지속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했던 말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의미(meaning)는 단순히 우리 언어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의 의미는 사람들의 활동 속에서 형성됩니다. 같은 단어, 같은 개념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실천의 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I am your father”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아버지의 말로, 어떤 사람에게는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의 말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로완 윌리엄스는 신학 역시 신학 나름의 문법이, 곧 의미를 형성하는 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교회 속에서의 기독교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조를 외우거나 신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말하는,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네 가지 활동 곧 세례, 성경 읽기, 성찬, 기도가 중요합니다. 신조가 물론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조가 의미를 형성하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개념들이 교회와 교회가 속한 사회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야 하고, 또 개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방식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장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이루는 사상들 그 자체뿐 아니라 이와 관련한 생각과 행위, 기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관해서도 말하고자 합니다”(『신뢰하는 삶』, 17쪽).


로완 윌리엄스는 신학자는 언제나 위기 상황에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자는 풍성한 교회의 실천과 기독교적 삶을 자기 나름의 논리와 개념으로 정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언어와 방법론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풍성함을 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풍성함을 파편적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불운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에게 있어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나 때문에 배제된 삶의 다층성, 무규정성에 대해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머리를 가지고 만들어 가는 논리를 조심합니다. 이는 내가 주체가 되고 무언가가 타자가 되어 끊임없이 ‘나 아닌 것’을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논리로 만들어 가는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이 실천으로 가는 일관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형태는 앞서 말했듯 개인의 깊은 영성과 정치적 활동입니다. 로완 윌리엄스가 그리스 존재론보다 그리스 비극을 우선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삶의 모호성, 비극성, 무규정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Vladimir Lossky (Public Domain)



성공회의 옷을 입은 정교회


로완 윌리엄스는 정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정교회 신학자인 블라디미르 로스키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로스키의 신학을 로완 윌리엄스가 요약할 때 쓴 가장 중요한 표현은 “via negativa”, 즉 부정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로스키를 통해, 계속 부정하면서 걸어가는 것이 신학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긍정신학, 곧 “하나님은 -이다”라고 하는 방식이 있다면, 반대로 부정신학 곧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고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부정신학적 방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습관에 균열을 내는 방식입니다. 언어의 벽 너머 더 깊은 곳의 신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부정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로완 윌리엄스는 이 부정신학 방법을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그의 논문 제목에서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는 단어 대신 부정의 길(via nagativa)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낯설고 때로는 거북하다고 하지만, 옆에 있는 살과 피를 가진 타자 역시 타자이기에 그 역시 신비롭고 낯선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언어를 가지고 살면서도 끊임없이 이 낯섦과 조우하면서, 이를 인내하면서 살아가야(via) 하는 존재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내가 매일 경험하는 타자의 낯섦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타자성을 절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이런 생각은 헤겔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1990년대 이후 질리언 로즈를 통해 헤겔의 철학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질리언 로즈의 중요한 저서 가운데 하나가 The Broken Middle입니다. 깨진 중간지대, 즉 어떤 양극단의 중간―예를 들자면, 자율적 주체와 타자의 절대화라는 양극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됨을 형성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타자성, 소멸될 수도 없고 절대화될 수도 없는 타자성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 신비를 존중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로스키는 “삼위일체론은 인간 지성을 십자가에 매다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합리성이 심판받는 지점입니다. 의미가 새롭게 분출되면서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교리는 인간적 사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했던 방식, 합리성에 대해 근원적으로 재조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에게 있어서 신비는 알 수 없음을 단순히 정당화하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계시된 내용 그 자체입니다.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근본부터 뒤흔드는 어떠한 힘이 됩니다. 신비라는 것은 정의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개념화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 생활방식을 부정할 때 만나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긴장을 풀고 우리 손을 하느님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활짝 열어놓습니다. 어떠한 환상도 없이, 투사하는 일도 없이, 또렷한 의식 속에서 자유롭게, 우리는 우리를 따뜻이 맞이하는 그분의 손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신뢰하는 삶』, 214-215쪽).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할 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합니다. 이러한 전이해는 그 대상을 실제로 보면서 새로이 수정됩니다. 우리의 전이해는 언제나 불충분하고 틀린 지식입니다. 하지만 전이해는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지식으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이해, 투사한 이미지를 부정하면서 자유로이 나아가게 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차갑고 무서운 암흑과 공허가 아니라 우리를 따뜻이 맞이하시는 손길입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주도권이 나에게서 저분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에 안주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단호히 몰아내는 가운데 ”예수의 말을 우리의 입술에 담아,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하느님께 나아올 때“(『신뢰하는 삶』, 215쪽) ”그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에 안주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서 내어집니다“(『신뢰하는 삶』, 215쪽, 번역 일부 수정).


ⓒmorguefile 


로완 윌리엄스에게 타자는 근원적으로 낯선 존재입니다. 타자를 알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신비의 말을 쥐고, 이 신비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신비를 마주하고, 그 속에서 서서히 변화되고 배워 가는 과정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진정한 인간됨을 kenotic self, 즉 자기를 비우는 자아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을 비움으로써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망 속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근원적인 관계성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성이고 이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창조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행위입니다. 혼자서도 계시는 분이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세상 속에 들어와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 자기 비움의 행위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이런 이해는 폰 발타사르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기비움의 이해는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나를 구성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근원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련의 이야기들이 다 독립된 것들이 아닙니다. 특히 로완 윌리엄스에게는 비트겐슈타인과 로스키가 함께 움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했던 언어를 매개로 한 사회성이라는 문제를, 로완 윌리엄스는 케노시스를 가지고 신학적인 내용을 채워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이 둘을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신학적 인간론을 형성하였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에서 신앙이라는 것, 기독교적인 삶, 교리 등은 추상적인 정보들의 모음이나 체계가 아니라, 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삶의 패턴을 가식 없이 인정하고 인식하며, 구체적이고 물체적인 사회적 관계망에 자기를 비우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이상이 로완 윌리엄스에 대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입니다. 당시 현대기독연구원에서 했던 2회 연속강연의 전반부만을 담았습니다. 2회 강연으로 로완 윌리엄스를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 내용이 로완 윌리엄스의 배경을 모두 포괄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로완 윌리엄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엿보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막 로완 윌리엄스를 알아 나가는 입장이라 여기에 대해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다만, 전에 다른 책에서 읽었던 하나의 사례가 하나 생각나 옮기고자 합니다. 톰 라이트는 2010년에 쓴 『그리스도인의 미덕』(After You Believe,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역간, 2010)이라는 책에서 로완 윌리엄스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톰 라이트가 참석한 예배에 한 시위대가 들어와 소란이 일어났을 때, 어떤 한 교역자가 시위대와 잘 이야기하여 소란을 진정시켰는데 그가 바로 로완 윌리엄스였다는 이야기입니다(『그리스도인의 미덕』, 447-449쪽). 『그리스도인의 미덕』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미덕을 추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미덕』, 10쪽).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함양한 좋은 예로 로완 윌리엄스를 언급하였습니다. 사례 전체를 쓰기엔 분량이 많아 한 문단 정도만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앞선 설명과 톰 라이트가 그리는 로완 윌리엄스를 함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때 나는 여러 해 전에 바로 그 교역자가 우리 도시 중심가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제 옷을 입고 있던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고 길바닥에 앉아 변성 알코올을 마시고 있던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했으며 그들도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당시에 그는 설교를 하러 가던 중이었는데,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만남은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부터 대다수의 일반인이 두려워할 만한 사람들과 차분하고 지혜롭게 얘기하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 후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그 위대한 예배를 드릴 즈음이 되어서는 믿음과 사랑과 용기의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순간(예배에 시위대가 들어와 소란이 일어난 순간—필자)이 왔을 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제2의 천성이 저절로 발동한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중에서도 이 사건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의 이름은 로완 윌리엄스이다.”

『그리스도인의 미덕』, 449쪽








설요한 /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신앙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업과 미래 걱정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기독교 읽기’를 취미로 삼아 버렸다.
실은 이런저런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생각과 실천의 이원론자에 가깝다.

<광장,청춘>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