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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믿음이 말 되게 하려고 한 사람”




1. 말에 서툰 말씀의 종교?


교회에 이미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들을 적당히 해도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심지어 어설퍼도 괜찮다. 듣는 사람들이 잘 알아듣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그들도 이미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즉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소한 사람은? 이 물음을 그동안 잘 안 물었다.


복음이라는데, 기쁜 소식이라는데, 들을 사람이 알아서 새겨야 한다는 것인지 하여튼 선포의 이름으로, 대언한다면서 일방적으로 내뿜었다. 그런데 듣고 있던 사람들이 갸우뚱하더니 손사래를 치고는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런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났다. 탈종교화나 세속화라는 말들로 포장했지만 이런 근세의 분위기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더욱 거칠어진 현대의 반종교적 비판에도 그리스도교는 별로 추스르지 못했다. 결과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라 불리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제 종교는 개인의 일이 되었다. 공감도 소통도 안 되니 각자 자기 방식으로 새기면서 만족하는 분위기로 몰려갔다.


교회 안에서 쓰고 있는 말들이 교회 밖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 좀 다녀 본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다.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이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은 안과 밖 사이를 넘나들며 잘도 다닌다. ‘믿음 따로 삶 따로’일 수도 있는데 돌아도 보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못 알아듣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암호’인 주술을 계속 구사한다. 신학도 전통적으로는 이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못 알아듣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안이 점차로 찌그러들면서 바깥이 급격하게 커졌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이것도 지난 이야기, 이제는 못 알아듣겠다는 것을 넘어서 아예 관심도 없다는 사람들이 막 늘어난다.



2. 상호관계방법, 마주함의 신학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폴 틸리히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에 대해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건 신학이 보통 잘 안하는 일이었다. 아니 신학은 그런 걸 했다가는 계시의 순수성이 왜곡된다고 생각했는지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했었다. 그런데 그는 과감히 내질렀다.


‘상호관계방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신학은 간단히 말해 신과 인간이 마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상호’라는 말이 그저 예쁘게만 봐줄 것은 아니다. 서로 마주한다는 것이 사이가 좋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복잡하다. 대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게 전제군주적 이미지로 신을 새겨 오던 교의학 전통에서는 뚜껑 열리는 일이다. 전제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사실 많은 유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편한 일이다. 시키는 대로 하고 살면 된다. 고민은 군주의 몫이고 나는 노예의 신세일지언정 편안함을 대가로 얻어낸다. 하니 마주하는 것은 꺼려진다.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절실해진 것은 사람의 삶이 대신 고민해 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문제들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제되었고 누구에게나 같은 교리만으로 처리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각자의 삶과 문제들에 더 진하게 내던져진 현대인에게 종래의 교리가 갈수록 생뚱맞은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계시이든 교리이든 듣는 사람에게 뜻있게 새겨져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상호관계방법이란 이를 좀 더 가까이 주고받게 해 보려는 노력이다.



3. 질문하는 인간, 대답하시는 하나님


상호관계방법을 그 꼴에서 보자면 질문과 대답이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질문이 먼저 있고 이에 대해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 동안 사실 질문이 없었다. 대답만 있었다. 그러니 그건 대답도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냐? 교리문답이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교리문답이야말로 대답이 먼저였고 그래서 결국 대답만 있었다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틸리히에 이르러 비로소 질문과 대답의 틀이 엮어졌고, 질문이 먼저 있어 대답을 조형하는 차원도 있고 거꾸로 대답이 질문을 결정하는 차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덮어두더라도 이건 적어도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 하는,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발상이다. 복음의 이름으로, 확신이라는 이유로 질러대어 온 선포가 엄청난 폭력이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노예의 편안함이라는 피학적 쾌감을 은혜로 간주해왔던 실상을 폭로하고 믿음의 참 뜻을 일구어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시는 하나님, 이것부터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종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신학이 이제 사람에게서 시작한다. 오해하지 말라! 사람이 기준이라는 것도 아니고 중심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질문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대답이 질문에 마주할 때에 보다 더 진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뜻을 더 맞갖고 알차게 그리고 말 되게 추스르려는 노력이 질문-대답의 상호관계방법이다.



4. 믿음, 기꺼이 회의하는 용기


틸리히가 말하는 믿음의 참된 뜻과 길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흔히 의심과 회의는 믿음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마귀의 짓이라고 저주하면서 거품을 문다. 그러니 혹시라도 솟구치는 의심을 꺼낼 수도 없다. 억누른다. 자유가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진리의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를 마구 억누른다. 종교 강박이 발생한다. 누군가 ‘종교는 신경강박증’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이에 대항하여 할 말이 없다. 강박증이라는 것이 솔직히 자기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니 자기 신념을 절대화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강박이다.


이게 아니라고 우기려니 강박적인 이미지를 바깥으로 투사하는 신념체계를 만든다. 우상이 만들어진다. 옛날에는 자연물로 우상을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우리 마음속에 신념이라는 꼴로 우상이 만들어진다. 그 우상의 이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 신앙이 자유이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지만 강박이라면 그것은 우상과 관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우상을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것은 유치한 질투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억압과 강박에 대해 아파하시기 때문이다. 우상 따위에 하나님이 왜 질투하시겠는가?


의심과 회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사진출처: Unsplash


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우상이 도사리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야 한다. 지름길은 믿음이 강박인지 자유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막연해 보이지만 우리 믿음 안에 의심과 회의가 허락되는지의 여부가 우상에 대한 판가름을 하는 좋은 잣대일 수 있다. 의심과 회의가 믿음을 방해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빠져 있는 함정을 들추어내고 거꾸로 의심과 회의가 믿음을 살아있게 한다는 예리한 통찰을 틸리히가 제시해 주었다. 의심과 회의는 믿음에서 질문으로 작동한다. 질문 없는 대답이 대답일 수 없다면 의심과 회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으려면 무조건 믿어야지 무슨 의심이고 회의냐고 펄쩍 뛸 수도 있지만, 그래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지만, 의심과 회의가 없는 믿음은 맹목적 믿음일 뿐이다. 그런데 맹목적인 줄 모르고 무조건적이라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 대목에서 틸리히의 한 수는 주목을 요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믿음이란 인간의 전인적 행위이다. 그런데 이 행위는 무한자에게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이에 잡혀 있는 유한자의 행위이다. 그런 고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유한한 행위인 동시에 무한자가 유한한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 유한자에게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믿음은 거룩함에 대한 체험인 한에서는 확실하지만 유한자가 관계하는 무한자가 유한자에게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는 불확실성을 지닌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제거될 수는 없고 다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용기이다. 믿음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지닌다”  (Dynamics of Faith, p.16)


말하자면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확실성만 붙잡으려 한다면 이는 눈앞에서 신을 보기를 앙망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으니 맹목적인 믿음이다. 이와는 달리, 불확실성에 마주하는 모험이 불가피하게 의심과 회의를 동반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겪어내는 용기가 바로 믿음을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의심과 회의는 물음일 뿐 아니라 심지어 실패를 동반하기도 한다고 틸리히는 열변한다. 결국 확실성만 잡고서 안정을 바라는 확신에서 나아가 불확실성에 연관된 모험까지 포함해야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일어나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역설적 얽힘이라는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이다.



5. 궁극적 관심, 회의의 바탕


그렇다면 도대체 믿음이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역설적 얽힘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만일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념이라면 의심은 믿음에 포함될 수도 없고 믿음을 역동적이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궁극적 관심이라면 의심은 믿음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믿음이 겪어야 하는 위험스러운 모험이다. 믿음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했는데, 틸리히에 의하면 ‘궁극적인 관심’(Dynamics of Faith, p.1)이란 살고 죽는 문제의 차원을 가리킨다. 목숨마저도 내던지는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가치를 표방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념, 국가, 성공, 명예 등이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예비적인 가치만을 지닐 뿐인데 결국 현실에서 이모저모로 해결이 도모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궁극적인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어찌해도 해결될 수 없는 저편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이미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믿음이 그러한 것이라면, 믿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의심은 학문적이거나 방법적인 의심이 아니라 확신과 결단 안에도 여전히 깔려있는 유한성에서부터 나오는 실존적 의심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해가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를 지닐까?


의심과 회의까지 포함하는 믿음은 이제 더 이상 머리에서 하는 지성적 동의나 가슴에서 뜨거워지는 감정적인 열정, 또는 손발로 뛰어다니는 의지적인 실천만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런데 지성적 차원에서는 믿음이 다소 증거가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인지행위라고 오해한다. 여기에는 실존적 참여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p.32). 그런가하면 증거불충분을 보완해 주는 의지행위에서 믿음의 뜻을 살피기도 하는데 이러다보니 종교에 대한 도덕적 해석을 강조하게 되었지만 믿으라는 명령이나 믿으려는 의지가 믿음을 일으킬 수는 없다(p.38). 또한 믿음은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일 수만은 없는데 이유인즉, 자아도취를 신실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p.39). 그러나 믿음은 이렇게 한 쪽으로 쏠린다면 자기도취의 왜곡과 우상숭배의 억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믿음은 이런 정신적인 요소들을 한데 모아 묶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의식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지적인 차원까지 포함되니(p.5) 바야흐로 전인적인 행위이다.


자유란.. 인간실존 전체가 행위에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진출처Unsplash


6. 믿음, 그래서 자유


결국 믿음은 전인적 행위로서 자유를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자유란 마음대로 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실존 전체가 행위에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오해된 나머지 믿음과 자유를 따로 떼어놓았던 역사가 꽤 길게 이어져 왔었다. 그러나 이게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건전한 상식으로 살아보려는 사람들로부터 조소 받게 했었다. 믿음을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확실성에, 그래서 불변부동성에, 결국 고정관념에 붙들어 매어버렸으니 스스로의 올가미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상황에서 틸리히가 그토록 강조하는바 “믿음은 자유가 그 관건인데, 그 이유는 자유라는 것이 인간의 전인적 행위의 가능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p.5)이라는 지론을 촉촉하게 새겨야 마땅하다.


자유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자유주의’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자고로 자유란 무슨 주의로 표기되는 특정한 사상의 소재가 아니다. 앞서 우상 이야기 할 때 자유를 떠올렸던 것도 같은 맥락인데 전인성을 부정하고 한 쪽으로 몰아 이를 내세우면 바로 자기의 신념을 절대화하게 되고 이를 지탱하고자 우상을 만들며 결국 여기에 속박되기 때문이다. 자유란 이에 대한 항거와 비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믿음이 확신이라는 이름의 속박인지 흔들릴 수도 있는 의심과 모험을 감내하는 용기를 포함하는 자유인지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고 하나님께도 물어볼 일이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역설적 얽힘이란 바로 이를 뜻한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교회 밖에서 말이 되고 뜻이 통하는 믿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상식적인 사람들을 향해서 나에게 이미 익숙한 언어로만 동어반복적으로 되뇌이지 말고, 소통 가능한, 그래서 보다 설득력 있는 생각과 말로 믿음의 꼴과 얼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정재현

연세대학교 신학과 종교철학전공 교수. 

연세대 종교와 사회 연구센터 소장 및 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

지은 책으로는 <신학은 인간학이다>,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망치로 신-학하기> 등이 있다. 

*사진출저 : 베리타스(www.verita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