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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타자를 향한 최초의 시선 : 영화 <시>를 통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주인공 양미자 할머니가 시를 쓰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동네 문화원에서 열린 김용탁 시인의 시 강좌를 듣고 시를 쓰기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미자. 어느 날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손자 종욱이가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학생인 박희진에게 집단 성폭행을 했고, 끝내 희진이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시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시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죽은 여학생, 희진이의 마음을 담은 시를 쓰게 된다.


영화 속 시 쓰기 강좌의 강사, 김용탁 시인은 제대로 봐야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자성어로 역지사지, 타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나의 색안경을 벗고 타인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할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바로 ‘봄’이다. ‘봄’이라는 안경으로 우리는 [시]를 봐야한다.


어느 날, 시상을 찾아 헤매던 양미자 할머니는 죽은 여학생이 뛰어 내린 장소를 찾아가게 된다. 한강 다리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다가 모자가 바람에 날려 다리 밑으로 떨어진다. 희진이를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상태를 대변하듯 말이다. 그러고는 다리 밑으로 내려와 메모지에 글을 쓰려하는데, 메모지 위로 비가 뚝뚝 떨어진다. 그곳에서 미자는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나는 드디어 그녀에게 시상이 떠올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본’것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죽은 여학생의 눈물을 말이다. 희진이의 고통이 미자의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자는 비에 흠뻑 젖은 채 버스를 타고 자기가 파출부로 일하고 있는 회장님 댁을 향한다. 예전에 회장님이 미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지만 거절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자기가 회장님에게 비아그라를 먹이고는 성관계를 맺는다. 할아버지가 좋아서가 아니라, 성폭행을 당한 희진이의 기분을 자신의 몸으로 느껴보려는 시도였다. 강제로 순결을 잃은 여학생의 수치심이 어땠을까 그녀는 직접 느껴보길 원했던 것이다.


문학강좌의 마지막 수업. 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시를 남겨놓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그녀가 남겨놓은 시의 제목은 ‘안네스의 노래’, 순결한 처녀의 상징인 안네스 순교자의 이름을 빗댄 제목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목소리로 시가 흘러나오다가, 여학생의 목소리로 바뀐다. 미자는 마침내 죽은 여학생이 된 것이다. 박희진과 양미자가 하나가 됨으로써 시는 완성이 되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이 최초의 타자에게 한 선언이다. 다시 말해 “너는 나다”라는 고백이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너와 나의 분리가 없었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요. 당신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타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선악과를 먹은 인류는 너와 나의 분리를 경험했다.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분리가 일어났다. 그 벌어진 틈이 서로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함을 일으켰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을 불어 넣었다.


지난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유가족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극우 세력들이 이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유족들은 죽은 자식들을 팔아 혈세를 빨아먹으려는 나쁜 인간들이라는 누명을 써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일베라는 곳에서는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유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으로 그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조롱하기도 했다. 나는 이 사태를 보고 정말 소름이 끼쳤다. 에볼라가 무섭다지만,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보다 무서울까? 이렇게도 무자비한 인간보다 무서울까?


[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는 손자 종욱이가 경찰에게 잡혀간다. 주의 깊게 보면 경찰이 찾아 와서 잡힌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신고해서 잡아 간 것이다. 할머니가 그를 심판했다. 손자를 말이다. 이건 단순히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적 측면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종욱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봐야 영화가 말하고 싶은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종욱이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 타자와 완벽하게 분리된 타락한 인간의 상징이다. 김용탁 시인이 시가 죽어가고 있다. 시는 죽을 것이라 했는데. 이는 곧 세상에 종욱이가 많아진다는 말과 다름없다. 세상은 점점 너와 나를 분리시키려 들 것이고, 타인의 고통에 전혀 무감각한, 에볼라보다 더 무서운 병이 나돌 것임을 그는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종욱이는 심판을 당할 것이다. 미자의 희생을 통해서 말이다. 종욱이가 저질러 놓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투신한 양미자 할머니의 희생이 마침내 종욱이를 심판한다는 말이다. 영화가 끝난 뒤를 생각해 보라. 나는 주인공이 죽은 희진이와 똑같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욱이는 영원히 후회할 것이다. 자기가 죽인 희진이가 바로 매일 아침 밥을 챙겨주던 자기 할머니였으니 말이다. 그 때서야 후회해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자는 영원할 것이다. 한 편의 시 로 남아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할 것이니 말이다. 자기 삶으로 써내려간 그 시가 남아서 미자의 영원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보고있는 것일까? 타자의 얼굴이 나의 얼굴임을 보고있는 것일까? 내가 욕하고 있는 타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창동 감독의 [시]를 통해 우리들의 눈이 회복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다”라는 최초의 인간의 고백처럼 나와 타자가 하나 되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말이다.





장대근 / 부산 동서대학교 청소년 상담심리학과 휴학생이자 로고스서원 18기.

전공을 버리고 인문학자의 길을 택한 과감한 남자. 

현재 휴학을 하고 주유소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