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두 번째 직장은 ‘M’ 포탈 사이트였다. 첫 번째 직장이 개신교 서점이었으니 일반 회사로는 첫 회사인 셈이다. 당시만 해도 - 무려 십 년 전이다 - 지금만큼 취업 스펙을 따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닷컴버블로 일자리가 꽤 있던 시절이었다 - 노무현 대통령 욕하는 사람들 보시라, 그나마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누가 더 많이 만들었는지를.
그럼에도 취업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지원하면 서류 전형에서부터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일년을 개신교 쪽에서 까먹은(?) 터였고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을 치던 차였다. 자신감 없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자소서(자기소개서-편집자주)는 읽는 사람도 맥 빠지게 하는 법이다.
많은 교회 오빠들의 고민 - 이라고 쓰고 개인적 의미에선 '비겁함'이라고 읽는다 - 인 교회 언저리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이 나에게도 있었다. 당시 (우리)교회 청년들은 뭐랄까, 세속적(?) 직업 세계에 대해 전문 용어로 단단히 ‘야시를 먹고’ 있었다. 세상의 직업 세계는 '술이나 쳐 먹이고 담배나 권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채 교회 밖으로 발을 디디는 걸 퍽이나 두려워했다. 내게도 그런 두려움이 적잖이 있었다. 솔직히 그 두려움 때문에 사회생활을 여러 번 그르쳤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 다른 수사들을 모두 버리고 표현하자면 -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예수 잘 믿으면 진학에서도 취업에서도 좋은 일이 생길 거란 ‘망령된 신화’를 심어주곤 했다. 이런 신화를 지속 가능케 하는 진학 및 취업 간증류가 상당히 유행했다. 나도 꽤 접했다(대표적으로 '원종수 권사'를 들 수 있겠다). 실제는 정반대였다. 대개는 학생부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보다 주일 성수만 간단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좋은 대학에 갔다. 대학 청년부 열성적으로 ‘섬기는’ 친구들보다 대예배 드리고 나가서 토익 공부하는 친구들의 성과가 훨씬 좋았다.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을 멀리하고 진학이나 취학이니 이야기하는 거 죄다 거짓말이다.
여하간 교회에서 난다 긴다 하던 오빠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경쟁력이나 자생력 양쪽을 상실하고 교회라는 범주 안에서 매몰되어 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꽤나 많은 교회오빠들이 세상 속에서 진지하게 나자빠졌다는 걸 어림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도전 끝에 낙망하고 있던 차, 여러 키워드로 일자리를 검색하고 있었다. 국문과 키워드를 넣었는데 그날 따라 처음 들어보는 인터넷 기업에서 국문과를 뽑는다는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국문과를 우대하다니 이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그만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첫 서류 전형 합격이었다.
사실 면접보러 갔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면접 장소가 역삼역과 인접한 현재의 강남 파이낸스 타워, 당시 스타타워였다. 처음엔 좁은 사무실에 닭장 같은 파티션을 상상했었다. 끝내주는 전망을 통해 사세를 과시할 수 있는 외부 회의실에서 면접을 보는 통에 정작 사무공간이 닭장 같은 지는 확인도 못했다.
첫 면접은 비교적 잘 본 듯 했다. 왜냐면 입사하게 되면 함께 일하게 될 부서장이 여자 상사여서다. 많은 교회 오빠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남자보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편하다 - 아, 이거 성급한 일반화 인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 있다가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임원 면접이라기에 나름 준비를 하고 갔는데, 왠걸, 1차 면접과는 달리 씹힌 테이프마냥 버벅 거려 당락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시만 해도 여전히 ‘순복음 어린이’었던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고 계시다는 생각을 했다. 전과 같이 않게 뭔가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과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행히 최종 면접 통보를 받았다(오, 지저스!). 최종면접은 무려 대표 면담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집을 나섰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할 예상으로 일찌감치 출발했다. 당시 우리 집은 용인이었는데 광역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강남까지 50분이 걸렸다. 면접시간이 오후였으므로 전혀 밀릴 이유가 없는 시간이었다.
아뿔싸, 톨게이트 즈음에서 차가 정체되기 시작하더니 꼼짝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경부선 버스 전용차선도 없던 시절이었다. 속이 타는 만큼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치 온 몸의 수분이 손바닥에 모이는 듯 손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 인사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차가 밀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했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영진 씨, 일단 와 보시죠.”
결국 면접 시간에 40분 지각 했다. 40분이다, 40분. 면접 장소에 갔더니만 이상하게 면접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대표가 긴급한 회의를 주재 중이라 면접이 늦추어진 것이다. 도착한지 20분 후에 면접이 시작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축이고 젖은 손을 닦을 말미까지 얻을 수 있었다.
“실무진들이 결정한 사람들이니까 잘 뽑았겠지, 다들 인상 좋아 보이네요.”
라고 대표는 말했다.
면접이 끝나고 인사팀 담당자는 따로 나를 불렀다.
“일부러 지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심각한 결격 사유인 건 잘 알겠죠? 그래도 허영진 씨 선해 보여서 내가 대표님께 따로 보고 드리지는 않겠어요.”
결국 나는 40분이나 지각하고도 최종 합격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그 간 교회오빠로서 쌓아온 선한 인상이 통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매우 실감나게 경험한 나는 첫 월급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쳤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나를 ‘제대로’ 인도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었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참 좋겠지만 난 그 회사에서 6개월 만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무슨 신입사원을 6개월 만에 자르는 회사가 있나 싶겠지. 당시 100여명 되는 사람들이 해고를 당했다. 당시(지금도) 잘 나가는 게임 포탈을 운영하는 회사가 무리하게 검색 포탈을 서비스하겠다고 나섰다가 6개월 만에 시장의 간을 보고는 서비스 자체를 접어 버린 것이다. 아마 국내 IT 역사에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그 행간에 대기업과의 인수합병이 숨어 있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검색포탈을 한다는 걸 빌미로 회사 잠재 가치를 끌어 올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종 면접이 한 시간이나 늦추어 진 건 바로 그 인수합병 협상이 길어진 덕이었다.
40분 지각하고 합격한 회사에서 타의로 6개월 만에 잘렸다. 이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기업 M&A시장의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취업의 기쁨과 정리해고의 고통을 맛보는 것 말이다. 따지고 보면 실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정치를 잘 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세상의 직장 생활이라는 게 결론적으로는 실력과 정치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난 둘 다가 부족했으니 뭐, 잘릴 만도 했겠지.
개인적으로는 그 이후로 매사에 성급하게 하나님의 뜻, 인도하심 따위를 운운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것이고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난다. 물론 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순간, 순간 속에서 그 뜻과 조우하는 카이로스의 순간을 경이롭게 마주 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아무 일에나 하나님의 뜻을 가져다 붙이는 건 옳지 않다는 느낌적 느낌을 실존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C.S. 루이스의 지적대로 관료주의에는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 거개의 직장은 관료주의적이다. 그 안에서는 한 사람의 야망이나 잘못된 판단, 무관심이나 밥그릇 챙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양심이나 인간적 도리를 지닌 채 버티어 가는 것이다. 지금 드는 생각은 꽤 단정적이다. 일단 버티는 게 하나님 뜻이다.
이렇게 시작된 ‘밥벌이의 지겨움’은 여전히 지속된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반면에 차라리 인형 눈알 다는 게 나을 만큼 지겨운 일도 있었고 재수 없는 ‘인간’들도 수 없이 만났다. 어쨌거나 그럭저럭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내 직장 생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그럭저럭 버티어 갈 것이란 다짐으로 포장된 기도를 드릴 뿐이다.
허영진 / 수 차례 넘어져서 이지러질 지경이 될 즈음 겨우 서점 직원으로 자리잡은 교회 오빠.
간간히 책에 대한 ‘북’끄러운 글을 쓰는데 대개 글을 실어주는 매체는 페이스북이다.
세상과 예수 사이의 경계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보통은 언저리인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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