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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


<광장, 청춘>은 가능하면 다양한 글을 독자들께 선보이고 싶습니다. 특히 일상과 문학의 만남을 보여주는 좋은 글을 교회안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수미 선생님은 일상을 관통하는 문학의 언어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삶에서의 깨달음은 도달해야 할 어느 고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근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처음으로 반 단합대회를 한다고 들떠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주최한 반 대항 축구대회에서 아들이 속한 반이 우승을 했다는 것이다. 아들은 후보선수였고 아예 출전할 기회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우승을 기뻐했고 처음 하는 반 단합대회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신나게 친구들과 어울려 고기뷔페로 향했다.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원래 집에 오기로 했던 시간보다 40분이나 지나서 집에 돌아왔다. 귀가 시간은 어겼지만 중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날이라서 별 다른 꾸중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갑자기 회비로 가지고 나간 2만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궁금해졌다. 고기 뷔페가 1인당 1만2천원인 것은 알고 있었고, 이후에 노래방에 갔다는데 노래방은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니까 모든 학생이 8천 원씩 내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아들은 고기 뷔페에서 2만원을 다 냈기 때문에 자기는 노래방은 공짜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기뷔페가 1만2천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왜2만원을 냈냐고 했더니 음료수 같은 걸 추가로 더 시켜서 돈이 초과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2만원을 냈다는 것이다. 

 

아들은 평소에도 친구들과 군것질을 할 때 돈을 더 많이 내는 편이었다. 나는 평소 돈을 벌고 쓰는 것에 대해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서 아이들에게도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또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우리 애들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야 할 때 남들보다 더 많이 내면서도 그것이 손해를 보는 건지 어떤 건지 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엄마에게 받은 돈이니 아깝거나 하는 생각을 안 하는 듯이 보였다. 지금은 어려서 그 금액이 얼마 되지 않지만 어른이 돼서도 그런 식으로 지출을 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왜 너 혼자 2만원을 냈느냐 돈은 그렇게 쓰면 안 된다, 다 같이 먹었으니 똑같이 1/n을 해야 맞는 거 아니냐’며 아침부터 긴 훈계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게 아니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 친구들이 고기뷔페에서 2만원을 먼저 낸 것일 뿐 노래방에 가서는 다른 친구들까지 2만원에 맞춰 회비를 걷었고 그것으로 노래방에서 음료수도 샀기 때문에 결국 함께 한 친구들이 다 같은 금액의 회비를 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나는 아침부터 긴 시간 동안 의미 없는 말로 아들을 괴롭혔을까. 남들보다 돈 좀 더 냈다는 생각에 아들을 어리석다 생각했던 게 아닌가. 평소에 나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살아 왔으면서 아들에게 어설프게 훈계를 하며 아들만 억울하게 만들어 버린 셈이었다.



울타리 밖       – 박용래 -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이전에는 이 작품에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시골 고향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작품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인생의 대부분을 아파트에서 생활한 나는 이 작품에서 말하는 그런 고향을 현실적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내 마음 속에 긴 여운을 남길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에게 어설픈 훈계를 하다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 날,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는 구절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울타리 안이라면 자기 집이니까 정원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도 아닌 곳에 화초를 심을까? 아마도 화초가 주는 마음의 여유나 아름다움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이라는 말에는 집이 없어 아예 화초를 심을 공간조차 없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불특정한 사람들일 수 있다. 이곳은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배려하는 그런 행위를 ‘천연히’,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을 의도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행하는 마을이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호갱’이라는 말이 있다. ‘어수룩하여 남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손님’이라는 뜻이다. 본인은 손해를 입는 줄도 모른 채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정보들을 동원하여 분석하고 따져서 한 푼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똑똑하다 생각하고 뿌듯해하고, 반대로 작은 손해로도 쉽게 분노한다. 


그런데 ‘호갱’이 되는 것은 소비자 개인의 무지 때문만은 아니다. 변수와 편법이 많은 사회일수록 평범한 소비자가 호갱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기업이 개인을 속이려 작정한다면 기업에 비해 정보가 부족한 개인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다. 울타리 안에 쌓아 올리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울타리 밖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울타리 밖에도 심어놓은 화초를 실수라거나 ‘잘못된 판단 혹은 손해 보는 짓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의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개인이 조심하고 노력을 한다 해도 이 불안한 사회에서 파생되는 피로는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쌓여갈 뿐이다. 어쩌면 나도 이 사회가 주는 피로감 때문에 친구들보다 고작 돈 몇 푼 더 내는 아들이 ‘호갱’이 된 것같아 예민하게 굴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호갱이 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쌓이는 피로감이 어느 집의 울타리 밖 화초를 보며 그 여유와 배려에 쉽게 풀릴 지도 모른다. 울타리 밖의 세상까지 품어내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삶이 자연스러운 마을을 노래한 이 <울타리 밖>은 이렇게 내 마음을 은은하게 울리는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 정영모, <고향 이야기>, 2009년작.



이무튼 결과적으로 나의 어설픈 경제 교육은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사색의 의미를 안겨주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 물정을 영민하게 따지는 사람이 되기보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로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 울타리 밖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을이 되어주고 싶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피로감 대신 오래오래 잔광이 비치는 마을, 그리고 밤에 더 많은 별이 뜨는 그런 아름다운 마을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소망해본다.





이수미 / 문학으로 세상을 읽어주고 싶은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