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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불현듯, 뭉크의 슬픔에서 부활을 발견하다


* 에드바르드 뭉크, <불현듯>, 1907.


1.

나는 새로움을 좋아한다. 싫증을 빨리 내는 불확실한 사람이라는 비난의 소나기를 여러 번 맞고 나서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었다. 새로움을 좋아한다는 것을 자유로움이라고 짧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미래를 향해서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가슴 뛰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가슴 뛰는 내일이란 얼마나 즐거운가? 새로움을 좋아하면 몇 가지의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불안함이다. 알랭 드 보통도 현대인들의 불안에 대해 꽤 아는척을 했지만, 사실 나는 그가 말했던 것보다 더 깊은 불안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불안함은 '현대인'에 대한 고정 관념 속에서, 모든 것을 앎의 차원으로 포함 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마초 같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초 같은 강인함'이라기 보다는 '이빨 빠진 사자의 포효'에 가깝다. 두려운 사람이 더 소리를 지르기 마련이다. 삶이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확실한 것을 찾아다닌다. 확실함은 곧 안정적인 것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러한 노마드적 걸음이 지속되다 보면, 그 안정적인 것이 바로 정의인 줄로 착각하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안정감을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있다. 


허세라고 한다. 보통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잘하는 척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습성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허세,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허세, 되지도 못한 열정을 비전이라고 떠들어 대는 허세가 있다. 허세에는 공허함이 항상 맴돈다. 실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 안에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다. 우리는 현대인이 되기를 선택하면서, 스스로를 정의 내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자신이 믿는 종교, 지인들에 대한 평가, 또는 존 롤스의 정의론 같은 류의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다. '없음'은 항상 '있음'을 향해 간다. 없음을 추구하는 그 자체를 상실해 버리고, 자꾸만 있음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로 허세가 된다.  


신비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의 제자였지만, 극렬히 하이데거 방식에 항의했던 에마누엘 레비나스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신비를 제시한다. 신비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앎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목이 슬픈 짐승이 되는 것이다. 남녀 간의 관계는 알지 못함을 전제로 한다. 그 어떤 애무도 그 사람에 대해 알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사람을 잘 모르게 한다. 그래서 연인 간의 관계는 미래로 뻗어 나가는 신비이다. 미래로 뻗어 나가는 관계는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들 수 있다. 그들의 관계는 가능성 너머에 있다.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고유의 정체성이 자신으로부터 시간을 타고 미래를 열어 놓는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기도 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미래를 열어 놓는다. 이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부른다.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닐 가능성 너머에 있는 것. 


뭉크의 작품 중에 좋아하는 작품은 <불현듯>이란 작품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절규>라는 작품은 사실 평론가들이 의미를 부여한 결과이다. 그러나 나는 <절규>가 아닌 <불현듯>이라는 작품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뭉크를 만났다. 불현듯, 우리 가운데 죽음이 가까이에 있고,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이 나를 억누르며,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불현듯, 죽은 아버지가 생각나고, 2년 전에 죽은 동생이 생각난다. 뭉크는 그랬다. 항상 그런 죽음과 직면하여 견뎌내고 그것을 결국 자신의 언어로 나타냈다. 인생을 살 때 가끔 뭉크의 그 순간을 만난다. 오히려 사물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절규보다는 불현듯 삶에 쏟아져 들어오는, 침노하는 죽음 이후를 본다. 


‘누미노제’라고 불렀다.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구성하기 전, 존재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신비에 대한 경외함을 ‘누미노제’라는 단어로 추상해냈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함에 앞서서 C.S 루이스는 우리 존재 너머에 존재하는 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자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33살이 되었을 때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와 만났다. 누미노제가 불현듯, 두려움으로 엄습하더니 이내 그것은 내 삶 속에 신비가 되어 미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2.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첫 번째 세계대전 후 길을 잃은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들을 지칭 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신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데, 어떤 길로 걸어야 할지 몰라서 서성이는 사람들이나 길 잃은 사람들, 길 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 단어에 많은 청춘이 포섭되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가지고 예전의 상황이 현재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나는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길은 없었다. 좀 더 나아가 대학생이 되면 나는 삶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도 길은 없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정해진 구조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길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길이 없었다. 그리고 길을 찾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서성거리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되어서 방황하는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간극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길항의 중간에서 서성거렸다. 


멋진 차를 타서, 맛난 음식을 먹어서, 뻔쩍거리는 구두를 신어서, 감당하기 힘든 경치를 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뻐하는 사람 외에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다들 기쁨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욕망이 만들어낸 인셉션이었다. 멋진 차를 타보았는데, 맛난 음식도 먹고, 구두도 사고, 좋은 경치도 봤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항상 붙어있었는데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순간 발생한 행위는 시간과 함께 날아갔다. 오직 머릿속에 기억으로만, 추억으로만 존재했다. 추억과 기억을 위해서 오늘을 사는 건가? 과거를 위해서 현실을 살아내는 것은 정말 기쁘지 않은 일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을 반납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까르페 디엠’이라는 교조적인 외침으로도 이 외로움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다시 ‘누미노제’가 생각났다. 



‘구텐베르크 갤럭시’라고 한다. 문자와 활자의 세계, 그 광활한 갤럭시의 세계는 문자의 체계가 인간의 모든 삶을 해석한다는 거대한 인식론의 우주였다. 그리고 결국 이게 맞았다. 지식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존재하고, 그것을 넘어선 것들에 대해선 우리는 다가가지 못한다. 해묵은 논쟁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다툼이 아직도 깨끗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표현한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건가? 표현의 재료는 문자라서 텍스트의 해체를 이야기했던 데리다조차도 이러한 구텐베르크 갤럭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작가와 학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메시아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언어에는 희한하게도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왠지 이 말을 들으면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다. 메시아라는 분이 오신다는 것, 과거로부터 걸어오셔서 현재를 걸으시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신다는 것은 내게 더는 불연속적인 단절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쁨을 주었다. 이런 기쁨은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말이다. 메시아라는 분이 예수라고 하셨다.


예수라는 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았고, 허세를 부리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조건에 승복하는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박하고, 순진하며, 사랑하는 게 전부인 것 같은 평범한 목수같이 보였다. 나는 금방 번연계의 공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 자신을 열어 놓아 미래로 흐르게 했다. 처음에는 별들을 세다가 곧 바다의 모래알을 헤아렸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의 역사가 되어 나는 돌 감람나무에서 참 감람나무가 되었다. 신기했다. 나는 신비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고, 정의 내릴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돈으로 소유할 수 없는, 어제도 계시며 현재도 거하시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실 그분의 누미노제였다. 나는 베드로처럼 엎드려 이 죄인을 떠나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불러 존귀하게 대해주셨다. 


* 에드바르드 뭉크, <별이 빛나는 밤>, 1922-24. 


종이라고 부르던 사람들로부터 떠나서 나는 아들이 되었다. 가능성 너머에 있는 존재, 그래서 나는 미래로 걸어간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건너 살갗의 언어로 삶을 표현한다. 길을 잃은 나에게 그분은, 내가 길이니까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그분은 자연스럽게 바람이 되어서 나를 보이지 않게 이끌어 간다. 나는 저항할 이유 없이, 그 여유 있는 바람에 흩날려 날아간다. 불현듯, 뭉크의 슬픔 속에서 부활이라는 기쁨을 본다. 과거를 지나간 사람들이 그 시간에 일어나는 광경에 놀라 미칠 지경이다. 이 길은 항상 새롭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기쁘다. 새로움을 안정적인 것에 반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자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나는 열정에 불타올랐다. 연역적으로 선포한 창조의 계시가, 성육신의 비밀처럼 내 삶 속에 가득히 넘쳐난다. 신비로운 시간, 신비로운 관계, 그 신비로움 안에서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든 것이 한가지였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나는 그 기적을 살고 있다. 기쁘다. 그분이 오늘도 하염없이 나귀 타고 걸어오시는 장터 어귀, 나는 그물을 내려놓고 그 길을 준비한다. 오늘 저녁은 물고기 반찬이 한 상 가득하겠다.





민경인  /  국제구호 NGO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청년.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는 의지를 가지고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