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안의 천국과 지옥
구토가 나올 것 같다. 출근시간부터 마칠 때 까지 끊이지 않는 세차, 내가 지쳐있는 것도 모르고 트렁크까지 열어서 청소해달라는 사람들, 대충했다고 화내는 손님들, 한 손님이라도 더 받으려고 애쓰시는 사장님.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지치게 한다.
손님이 많이 오면 알바생은 짜증날 수 밖에 없다. 일한 시간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지, 일한 양이나 장사가 잘되는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알바생은 정해진 노동시간을 보내고 급여를 받는 것에 목적을 두지, 기업이 잘 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짐으로 느낀다.
장사가 잘 될수록 기분이 좋은 사람은 사장님이다. 물건을 얼마나 팔았는지, 또는 손님을 얼마나 받았는지에 따라서 수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한 손님이라도 더 받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에 40~50대 정도의 세차를 한다. 아주 죽을 맛이다. 어제는 무려 64대나 받았다. 사장님은 신이 나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다녔고, 나는 생지옥을 경험했다. 같은 주유소안에서 한 사람은 항상 천국을, 한 사람은 지옥을 맛보는 이중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존재가 변하지 않고서는
타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 하나됨,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이는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이 최초의 타자를 바라보았던 시선이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창 2:23. 새번역) 그러나 타락 이후에 아담은 하와를 고발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너는 나다.“ 라고 했던 그가 죄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한다. 타락은 바로 관계의 어긋남이다.
내가 일하는 주유소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사는 우리 모두가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누구는 막대한 부를 누리며 행복에 겨워 살고 있는데, 누구는 밥 한 끼 해결하기 힘들어 절절 매야하는, 관계의 어긋남이 만연한 이 사회가 바로 지옥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지옥을 하나님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체제의 변화다. 예를 들어 사장님이 나에게 세차 한 대당 200원씩 인센티브를 준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세차를 하도록 유도할 것이고, 세차를 하는 것이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탈바꿈 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사장님과 나는 하나 됨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체제의 변화는 문제해결의 본질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에 앞서 존재의 변화가 필요하다. 사장님은 인센티브 제도를 모를까? 아니다. 알고 있다. 실제로 소장님이 사장님에게 건의 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사장님은 손해를 볼 것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센티브 없이도 알바생이 더 열심히 일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됨을 위해 희생을 선택할 수 없다면 체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혹 바뀌더라도 다시 뒤 엎으려고 할 것이다. 존재의 변화가 없으면 체제의 변화는 무의미하다.
* 김근중, <본성-존재.8-02>, 2002.
하나됨을 위해 투신하는 존재
하나님 나라는 존재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중략)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21절 (새번역)
어느 ‘때’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공간’도 아니고, ‘체제’도 아닌 ‘너희 가운데(안)’에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선언한다. 하나님나라는 우리의 존재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바꿔 말해 하나님나라는 존재 그 자체다. 누군가는 지옥을, 누군가는 천국을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예수처럼 지옥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존재. 이 이중적인 세계를 하나로 합치려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나라고 크리스찬이다.
하나님나라는 어느 때에,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 일어난다. 많은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체제가 변화되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리라는 낙관을 가지고 있지만, 존재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허상이다. 어긋난 관계와 이중적 세계를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하나됨을 위해 투신하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그 때야 비로소 구조의 변화가 따라 올 수 있고 정착할 수 있다.
장대근 / 부산 동서대학교 청소년 상담심리학과 휴학생이자 로고스서원 18기.
전공을 버리고 인문학자의 길을 택한 과감한 남자.
현재 휴학을 하고 주유소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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