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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첫 번째 장면, 기도원.


여기는 기도원, 중고등부 연합수련회가 열리기에,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집회에 참석하기 싫다는 이유다. 사실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중고등부의 10명 남짓의 아이들은 누가 봐도 ‘예수 안 믿게 생긴 아이들’이다. 그렇게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진짜 안 믿는 것임에 틀림없는 아이들이다. 그 어떤 누구도 ‘수련회’라던가, ‘예배’라던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당연히 시설이 낙후되고,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을 압박하는 ‘연합수련회’의 분위기가 달가울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그들의 칭얼거림을 들어주며, 슬슬 달래고 있었다.


그때였을까? 갑자기 자원봉사자가 우리들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 올라가셔야 합니다. 개회예배가 시작한지 10분이 지났어요.’ 갑자기 살짝 화가 났다. 아니 개회예배가 시작한지 10분이 지나던, 1시간이 지나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에 있는 아이들이 가기 싫다며 칭얼대고 있으니, 어떻게든 달래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괜히 그를 향해 화를 냈다. ‘아니 먼 곳에서 왔는데 좀 쉬면 안 됩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가주세요.’ 그러자 괜히 자원봉사자도, 중고등부 아이들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도사님, 저희가 알아서 도망쳐 나올 테니까 일단은 올라가요. 저 선생님이랑 싸우면 괜히 전도사님만 난처해지잖아요.’





두 번째 장면, 교회.


그렇게 3박 4일의 수련회를 보내고 교회로 돌아왔다. 수련회에 참석한 한 친구가 집에 가서 수련회 이야기를 꺼냈나보다. 그 친구는 ‘노래 부르는 것도 너무 좋았고요, 수련회도 너무 좋았어요.’라고 자신의 할머니인 권사님께 나름의 소회를 간단히 말했다. 사실 그 친구는 즐거운 찬양에 맞춰서 매번 나이트댄스를 췄고, 기도시간과 설교시간에는 모바일게임을 하느라, 혹은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 노가리를 까고 번호를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연합수련회가 끝난 이후에는, 애들도 고생했고 (그리고 나도) 고생했기에, 정말 신나게 1박 2일 동안 우리끼리 팬션을 잡아서 신나게 놀았다. 기도? 찬양? 말씀? 그런 것 하나도 없었다. 2박 3일동안 내내 그런 것들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의 ‘수련회 감상평’은 사실상 별 다섯 개일 수밖에 없었을 터.


그 이야기를 듣고 온 권사님이 내게 들뜬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셨다. ‘전도사님, 우리 OO이가 이번 수련회 너무 좋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순간적으로 모든 상황파악이 완료되었다. 그 친구의 ‘본의’와 권사님의 ‘오해’와,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도. 이러한 위기상황에 성령은 항상 우리게 ‘할 말’을 가르쳐주신다. ‘다, 저렇게 보여도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더라구요. 하하하’ 그 친구의 말처럼, 나의 말 또한 ‘본의’는 따로 있지만, 권사님은 ‘오해’를 하게 되는 애매모호한 말이다. 권사님은 ‘하, 우리 OO이가 조금만 더 뜨겁게 믿었으면 좋겠는데’라며 들뜬 표정으로 나름의 기대감을 표출한다. 진실을 말해줄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다.





세 번째 장면, 중고등부실.


사역을 해나가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이 친구들과 격없이 어울리는 일이다. 가끔 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이 친구들의 장난, 그리고 친구 대하듯이 걸어주는 장난들이 오히려 내게 솟구치는 힘을 선사한다. 그 날도 중고등부실에서 아이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리고 아이들 또한 나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런데 아뿔싸, 잠시 장난을 걸고 본당에 다녀온 사이, 아이들의 장난이 너무 커져버렸다. 두 친구가 주먹다툼을 하고 있었다. ‘중2병 걸린 고등학생’이라 항상 놀려왔던 친구들인데, 몸은 어른이 되어가지만 정신은 아직 어린아이인 친구들의 주먹다툼에는 사실상 답이 없다. 당황하고 놀라서 이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너희들 싸우면 나 짤려야 돼.’라는 말과 함께.


그러고 보니 5주 동안 나는 이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나의 실력도 그렇거니와, 이들의 실력도 일천하여 항상 ‘초코파이’를 통해 이야기했다. ‘세상은 마치 이와 같아. 사람이 10명 있는데 초코파이는 9개 밖에 없는 것, 그럼 어떡하겠어? 자신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않겠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단다.’ ‘누군가는 초코파이를 3개, 4개를 차지하려고 해. 1개만 먹어도 충분하면서.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먼저 각자가 1개씩 가지려고 하면 자신의 것만 포기하면 돼. 그럼 아주 쉽지. 하지만 누군가가 3개, 4개를 차지하려고 하면 그 사람과 싸워야만 해.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야만 해.’라고.


그래서 이들을 진정시킨 후에 한마디를 던졌다. ‘누가 초코파이를 포기할래?’ 그때 이 ‘중2병 걸린 고등학생’ 두 명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서로가 서로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도, 피해를 입은 다른 여학생에게도 사과를 건넸다. 이 친구들은 수련회 기간 동안 집회에 참석하기 싫다며 실랑이를 벌이던 친구들이었고, 매번 집회가 끝나면 흡연을 위해 사라지던 친구들이었다. 또한 매 찬양 때마다 ‘나이트 댄스’를 선보였고, 자신의 가족에게는 ‘수련회 너무 좋았어요, 노래도 너무 좋았고요.’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오해’를 주도한 친구들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친구들을 만나고, 그 이후 1년 정도의 시간동안 단 한번도 ‘이 친구들은 신실한 친구들이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 나지 않으면 좋겠고, 담배를 피는 것과는 별개로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들키지 않아서 큰 야단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또 이성친구와의 교제 속에서 과도한 스킨쉽으로 마음의 상처, 몸의 상처를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만 갖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대치는 낮았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그랬다. 이들 스스로도 그랬다. 하나님? 교회? 신앙? 그냥 그렇고 그런 언어들에 불과했다. 


그런데 중고등부실에서 있었던 주먹다툼, 그리고 화해라는 극적 사건이 있은 이후로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아니 오히려 근본적으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영접기도를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일까? 아니면 매주 교회에 출석하면 예수를 믿는 것일까?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예수를 믿는 것일까? 정확한 답은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질문의 범위 속에서는 절대 ‘예수 믿는 친구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이들이 ‘누가 초코파이를 포기할래?’라는 질문 앞에서 눈동자가 흔들리던 그 장면, 그 뇌리에 꽂힌 장면이 너무도 가슴팍에 남는다. 


어쩌면 이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가 삶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아닐까? 알게 모르게 이들의 삶 가운데 젖어든 예수가, 어느새 이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텐데, 그 이전의 삶을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오히려 나는 기도도 하고, 말씀도 연구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전도사지만, 누군가와의 싸움 속에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눈동자가 흔들리고, 상대에게 사과의 악수를 건넬 수 있을까?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분명해졌다. 이 친구들, 의외로 예수와 친하다는 사실 말이다.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광장, 청춘> 기획/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