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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내 안의 윤똑똑이



내 안의 윤똑똑이 

[서평] 폴 투르니에, <강자와 약자> (IVP, 2014)




누구나의 인정 욕구 

사람들 누구나 약점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가 드러내놓고 '나 이런 사람이오.’ 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필경 그의 입으로 묘사되는 그는 진정 그가 아니지 싶다. 물론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자신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그런 사람일까 되짚어봐야 한다. 반대로 ‘난 이렇게 못난 사람이오.’ 한다면, 그 말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이 못났다고 말하며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오늘 내 약점을 들키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아무리 그 말이 맞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그 자리에서 인정하기란. "아.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말하지 않고 넘어가주길 바랄 뿐이다. 그저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자리라도 마련되어 있으면 모를까. 조금 낫낫하게 대해주면 덧날까.

 

<강자와 약자>, 폴 투르니에 (IVP)


강자 혹은 약자의 반응

<강자와 약자>는 스위스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1898-1986)의 저서이다. 투르니에는 인격 의학을 주창한 사람이다. 인격 의학이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의존하는 기술적인 의학의 반대 개념으로 의술과 인간 이해와 종교가 결합된 의학으로서, 이를 통해 전인적인 치유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책은 그가 말하는 인격 의학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준다. 그는 기술적인 심리학의 맹점을 꼬집으며 인격 의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했을 때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사람을 강자와 약자로 나눈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평등한 사회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 서로간의 불편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 단순히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전 시대의 지배와 피지배의 뚜렷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심리학의 역할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 속을 들여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투르니에는 이를 두고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즉 두려움에 대한 강한반응(강자) 혹은 약한 반응(약자)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투르니에는 유독 성적인 이미지를 많이 가져온다. 자위행위 혹은 성도착증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적인 요소를 가져오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억압으로 나타날 때 인생이 불행해진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성적인 것이든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어떤 영역이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강자는 약자를 누르고 약자는 자기 자신을 억압하며 자기를 드러낸다. 이를 두고 투르니에는 강한 반응, 약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사실 책제목은 강자와 약자인데 책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반응'이다. 그가 왜 반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궁금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런척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강자가 되고 싶어 한다. 성공관련 서적이 꾸준히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반증이다. 누구나 약한 모습이 있기에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차이는 그 모양새가 세련됨을 유지하는가이다. 심리학은 억압되었던 약자의 본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도록 한다. 그러면서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임상적으로 진일보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투르니에는 말하기를 “단지 외적인 반응만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이제는 양심을 억압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다른 유형의 반응으로 변화시킨 것밖에 없다.


폴 투르니에 


억눌린 양심을 해방하는 법 

투르니에는 심리학자이면서도 심리학의 주류인 프로이트학파의 맹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들의 해석이 사실상 형이상학에서 나왔음에도 과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무의식에 자극을 받아 행한 행동에 대해 이상주의적 근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본능적인 반응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본능에 충실하라는 이야긴데, 거기에 딴죽을 건다. 본능에 충실하다보니 실상 양심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억압되었던 본능이 오히려 양심을 누르고 있는 모양새라니. 이를 두고 바뤽은 권력을 향한 본능을 양심의 가책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라고 한다. 최고 권력에 오르면 모든 것이 면죄되니 맞는 말이다. 이는 마치 성범죄 사건을 일으키고도 당당하게 목회를 하고 있는 전병욱목사에게 부여되는 면죄부와도 같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흥을 허락하신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신 것 아닌가" 이들은 분명 자신들의 양심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투르니에가 제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뻔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복잡한 논의를 펼쳤는가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과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욕망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 소스라칠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착각이 작용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적인 억압으로 인한 폐해로 확인할 수 있다. 정신분열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그룹이 기독교 가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억압에 의한 순종인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확신에 의한 순종인지는 날마다 점검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실상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는 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투르니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온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구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인 힘을 영적인 힘으로 착각하며 그러면서 교만이 발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이 하게 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러니 늘 자신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라는 책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는 성인과 악인,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다. 우리 자신 안에는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고 있다. 서로 다른 사안에 대하여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두 가지의 반응 중 어느 한 가지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반응들은 오히려 본성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렇지 않은가? 위대한 다윗도 본성에 넘어갔으며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신다. 각각의 삶과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을 발견해 가는 다양한 경험을 보여준다. 우리를 온전히 받아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의 올바른 반응은 자기 안의 모든 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정직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윤똑똑이’라는 단어가 있다. 저 혼자만 잘나고 영악한 체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윤(閏)’이라는 단어는 음력 ‘윤달’에서 가져왔다. 음력과 양력의 날짜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달이다. 윤달은 ‘썩은 달’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는 현실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가짜’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또한 윤(閏)은 남의 자리를 빼앗은 임금을 나타내기도 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억누를 필요가 없다. 정직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내안의 모든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두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약한 반응 혹은 강한 반응이 아니라 아마도 정직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만약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겉으로 허세를 부리는 진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중심을 차지하는 윤똑똑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권영호 /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목사다. 

책으로 배우는 것만큼 발바닥으로 부딪히는 좌충우돌을 경험하며 

<무진기행>의 안개와 같이 뚜렷이 존재하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인생를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딸과 신통한 아들과 함께 인천의 서부제일교회를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