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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고 답하다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


글. 김희림  _20150707



 

 

모든 대학생들이 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 무슨 과를 가면 좋을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문과에서 전공은 안 중요해. 어차피 모든 대학생이 다 영문학과지, 뭐.”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모를 말씀이었지만 대학에 와서 보니 아버지는 옳았습니다. 도서관에 앉으면 같은 책상에 앉은 대학생들의 전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 같이 각종 영어 시험을 붙들고 있으니까요.


철학과에 입학하고 가장 놀랐던 것은, 적잖은 동기들이 대학에서 처음 들은 수업이 철학 수업이 아니고 경영학 수업이라는 것입니다. 아예 경영학과로 전과할 생각을 갖고 철학과에 온 친구들이 많았다는 뜻이지요. 이 충격을 간직한 채 대학원 수업을 위해 (문과대학은 너무 작아서 대학원 수업을 진행할 충분한 자리가 없어서) 넓고 쾌적한, 그리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경영대를 찾은 저는 아버지의 말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모든 대학생이 다 경영학과구나.”



*출처: moguefile 



인문학이 빠진 사회, 인문학에 빠진 나

 

“뭐 전공하니?” “나중에 뭐 할 거야?” 


대학생들에게는 참 익숙한, 항상 같이 다니는 두 질문. 그러나 인문학도들에게 이 질문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 학문을 죽이는 우리 시대의 인문학에 대한 조롱의 담론이 건재한 것을 말입니다. 인문학 학과들을 통폐합하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 시대에서 너는 무슨 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걸로 무엇을 할 것이냐? 과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제가 곧 죽어도 철학과에 가서 죽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책장에서 집었던 날의 날씨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거든요. 인간은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 번식을 위한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도킨스의 주장이 담긴 「이기적 유전자」. 저는 이 책을 심장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상식을 깨고, 통념을 짓밟고, 관점을 뒤흔든 이 책을 소화하지 못 하고 반박하지 못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았거든요.

 

이를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의 모든 저작을 다 읽었습니다. 나아가 에드워드 윌슨,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스티븐 제이 굴드, 프랜시스 콜린스, 찰스 다윈의 책들에 코를 박고 읽었어요. 수학을 잘 했다면 생물학과로 방향을 정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할 정도로 당시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생물학 환원주의와 그 반박에 미쳐있었고, 지금도 그 분야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쫑긋해집니다. 그런데 하도 그 쪽 공부를 하다 보니,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세상은 이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데.



*출처: moguefile



역설적이게도, 저는 그렇게 인문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인문학이 심도 있게 다루는 주제들을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으로 여기는 생물학자의 글에서 목마름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 독서 식단에 편식은 드물었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종교, 예술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읽으려고 노력했고,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들고 읽어댔습니다. 인문학이 빠진 사회에서, 인문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 주제들의 밑바탕부터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만학의 왕이라는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꼭 철학과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주팔자 보는 법을 배우느냐, 취업 안 되는데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 이런 말들이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아예 신경을 쓸 것도 없었지만, 철학과가 가장 낮으니까 성적 맞춰서 넣느냐는 억울한 오해와, 학과가 통폐합되면 어쩌려고 그런 곳에 지원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섞인 걱정에는 답답해서 쉽게 대거리할 수도 없었지요.

 

 

반성하고 해명하는 작업

 

그토록 원하던 철학과에 합격하고, 들뜬 마음으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철학과는 제가 고등학생 때 그리던 곳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철학 수업에 대한 기대보다 경영학 수업의 수강 신청 성공에 더 급급한 동기들을 만났고, 시험 기간이 아닌 도서관은 각종 영어 시험의 수험생으로 가득한 어학원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질문과 열띤 토론의 향연이리라 생각했던 철학 수업의 상당수도 고등학교 윤리 시간과 다르지 않은 교과서 요약과 암기, 그리고 형식적인 발표였고요.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순수 학문 학과들에 대한 지원을 열심히 깎아댔고, 1학년 2학기부터 철학과 부학생회장을 맡은 저는 난데없이 예산 문제를 고민하면서 정말로 통폐합이 되는 것은 아닐지 상상해야 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3년 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저는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하나의 질문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질문은 저를 놓아준 적이 없었고, 저 역시 그 질문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도 제게 속삭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인문학의 무거운 주제들을 우습게 보는 담론이 가득하고, 그 주제들을 하나씩 살펴보기에 너의 아둔한 머리는 버거워하고, 사람들은 철학을 사주팔자로 취급하고, 철학과에 가겠다는 열정을 대학에 쉽게 가려는 꼼수로 착각하고, 철학과 학생도 철학보다 영어와 경영학에 관심이 있는데, 학문의 전당은 학문을 개차반 취급하는데. 도대체 이 시대에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출처: moguefile



철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은 ‘와, 그렇군요!’라는 짧은 탄식과 함께 잠깐 고민하다가 묻습니다. “철학이 뭐예요?” 철학과 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 중 하나지요.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양호한 편에 속합니다. 요즘은 하도 인문학 관련 ‘상품’들이 많이 팔리는 시대이다 보니, 그런 상품을 한번이라도 소비해본 분들은 대뜸 상품 평을 하고 싶어 하거든요. 철학은 이런 것이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철학은 대단히 엄밀한 체계를 갖춘 전문적인 학문인데,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에 대해서 떠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자기 의견을 다 밝히고 나서는 제 의견을 물어봅니다. 철학이 무어냐고요.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해명하고 반성하는 작업’이라고요. 무언가에 대해서 면밀하게 탐구하고 탐색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정의는 약간 부족합니다. ‘해명한다.’, ‘반성한다.’는 두 동사와 함께 쓰여야하는 목적어가 없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해명하고 무엇을 반성한단 말일까요? 왜 이 정의는 목적어를 결여하고 있는 것일까요?

 

목적어의 자리에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명과 반성의 작업은 인간의 사고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할 중대한 과정입니다. 과학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과학적 인식의 문제를 고민하는 학문을 과학철학이라고 부르고,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에 대해 다루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철학이라고 칭합니다. 철학의 세계는 넓습니다. 너무 광활해서 그 길의 입구 밖에서 철학을 바라보면 목적지가 보이지 않고, 그 길에 들어설 용기는 더더욱 사그라집니다.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길을 여행해야지, 저렇게 넓고 길을 잃기 쉬운 곳을 왜 여행한단 말인가?’ 많은 이들은 철학이라는 말에서 목적어를 간과합니다.

 


*출처: moguefile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철학은, 그리고 인문학은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반성하고 해명한다는 거창하지만 확고한 목적을 갖고 있는 단어이기에 ‘목적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목적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오해 때문에 도리어 우리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것이지요. 해명하고 반성하는 작업 따위, 쓸모도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아쉽습니다.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그 정책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분명히 해명했다면, 우리 사회에 정치에 대한 불신의 골이 이토록 깊었을까요? 우리 사회에 전반에 걸쳐서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탄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았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철학이 한껏 무시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철학의 필요성을 논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가시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 인정을 받는 사회에서 ‘모든 것’이라는 두루뭉술하기 그지없는 것에 대해서 해명하고 반성하는 작업이 어떻게 관심을 얻겠습니까. 그렇지만,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잃은 양만큼 과연 우리는 ‘하나의 것’들을 잘 챙기고 있을까요.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 모든 것에 대해서 탐구하겠다는 철학은 다양한 학문의 밑바탕의 한 구석을 지탱하고 있고,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여론의 수준을 높이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수많은 안건들에 대해서 해명하고 반성하도록 돕습니다. 목적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어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모든 대학생들이 영어와 경영학 서적을 뒤적일 때 제가 철학 논문을 뒤적이는 이유이고, 예산이 끝도 없이 삭감되어도 철학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동기이며,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우습게보며 저를 무시해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난해한 철학책을 독해하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남들이 쓸데없다고 여기는 철학 공부를 합니다. 목적이 없는 우리 시대,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에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희림 / 난해한 인문고전을 공부해서 남주고 싶어하는 인문학도. 

글(text)과 삶(context)을 무대로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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