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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위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한 마디

 



1. 본회퍼, 여전히 읽을 이유가 있을까?


최근 우리나라 신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이 미국의 막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입니다. 필자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스택하우스 교수와 디트리히 본회퍼에 관련하여 심각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스택하우스 교수는 필자가 코스 워크를 진행하는 과정을 지도해주는 위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코스 워크 3학기를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스택하우스 교수에게 정례적인 학업보고를 이메일로 보내면서, 향후 디트리히 본회퍼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필자는 스택하우스 교수로부터 매우 당혹스러운 답신을 받았습니다. 스택하우스 교수는 “자네가 본회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크게 실망이네. 나는 본회퍼에게서 오늘 이 시대를 위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네.”라면서, 매우 단호한 어조로 “자네가 그럼에도 본회퍼에 관하여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자네를 도와줄 수가 없네.”라고 적었습니다. 스택하우스 교수의 돌봄과 지도가 필요했던 필자로서는 며칠간을 어떻게 답신을 보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당시에 본회퍼의 공공신학에 관하여 연구한 두 편의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두 논문을 스택하우스 교수에게 첨부해 보내면서 “본회퍼 역시 당신과 같이 공적인 영역에 관심이 있었던 공공신학자로 이해될 수 있고, 따라서 그의 신학에서도 오늘을 위한 메시지를 충분히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의 기독론의 테제가 ‘오늘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입니다.”라는 답변을 적어 보냈습니다. 답신에서 스택하우스 교수는 본회퍼 신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매우 단편적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필자에게 “오늘을 위한 본회퍼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잘 찾아내 보게!”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스택하우스 교수의 부탁을 기억하면서 필자는 이 글에서 인간 본회퍼와 그의 신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특히 본회퍼의 중심 신학으로 알려진 십자가 신학이 아니라 성육신 신학에 기초하여 이 메시지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2. 성육신, 본회퍼 신학의 기초


『윤리학』에서 드러나는 본회퍼 윤리사상의 기초는 “그리스도-현실(Christ-Reality)”입니다. 이 그리스도-현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Menschwerdung)”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윤리학』에서 토대가 되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reality)이 이 세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본회퍼에게서 이 성육신의 사건은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존재론적(ontological)” 의미입니다. 이 존재론적 확신은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현실이나 세상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화해론에 기초하여 본회퍼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두 영역 사고(two-realms thinking)”을 해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두 개의 현실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연합된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하나의 영역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도 그 가운데 성육신하신 하나님만이 주권자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이 본회퍼 신학에 가지는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인간학적인(anthropological) 혹은 실존적인(existential)” 것입니다. 본회퍼에게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하나의 참 인간이 되셨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학적인 요청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적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참 인간이 되는 기초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너무도 큰 죄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기본권과 생명권을 빼앗는 것은 사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굶주리는 자에게는 빵을 주고, 노숙자에게는 집을 제공하고,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는 정의를 실현해주고, 노예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일, 다시 말하면 인간화를 위한 정의로운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일상적인 것을 향유하는 데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 스틸컷



3. 성육신의 첫 번째 의미, 혹은 현대인을 위한 본회퍼


얼마 전에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이 시간여행의 능력을 사용하여 남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이루기도 하고, 잘못된 만남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동생의 불행을 치유해주기도 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아버지를 마지막 만나는 기회였기에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제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글쎄다. 한 가지 있는데, 너랑 산책을 하고 싶구나!”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함께 해변을 산책하게 되는데, 그때 배경음악에서는 “일상을 즐기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노래가사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영화 관람자에게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항상 시간여행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 여행을 즐기는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선물합니다.


영화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필자는 필자 자신 안에도 숨겨진 현대인의 질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본주의와 물리적 성공의 신화에 사로잡혀서 특별한 것, 많은 것, 화려한 것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말하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본회퍼를 아주 특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습니다. 피아노 연주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기에 원했다면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의 불의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행동가였고,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간 진정한 제자였습니다. 모두가 본회퍼에게 맞는 칭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회퍼를 이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간주할수록 우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이거나 우리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본회퍼는 우리와 매우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일상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과 같이 본회퍼 역시 하루하루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옥중서간』에서 본회퍼는 참 신앙인은 세속적인(worldly)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저 하늘위에 계시지 않고 인간의 옷을 입고 세상 한 가운데로 오셨듯이 신앙인도 세상 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삶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누려야 할 세속적 삶의 한 가지 예는 세속적인 삶에서의 애정과 갈망입니다. 한 마디로 일상에서 주어지는 좋은 것들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유는 『나를 따르라』나 『성도의 공동생활』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저작들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오히려 세속적인 것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옥중서간』에서 본회퍼는 우리가 사랑, 우정, 신체적 즐거움과 같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온전하게 향유할 때 참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본회퍼는 자신이 평소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며 당연한 듯이 누리던 일상이 감옥생활로 인하여 제한이 되었을 때 그 소중함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던 독서를 마음껏 자유롭게 향유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즐기던 담배를 원하는 만큼 피우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힘겨움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를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본회퍼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비참하고 피폐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삶에서 순간순간 마주치게 되는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향유하는 것이 행복한 삶에 필수불가결하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과 같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일상적인 것을 향유하는 데 있다는 일상의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사진출처 : Unsplash



4. 성육신의 두 번째 의미, 혹은 한국 교회를 위한 본회퍼


서울의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한 교사께서 저를 찾아와 신앙상담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중성 때문에 힘들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를 물었더니, 자신은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사는 교회에서는 소위 말하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성도가 보기에는 정말 열심 있는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나가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면서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회식자리도 나가야 하고, 영업을 하면서 이익을 내려면 때때로 거짓말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건한 교사는 사실은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이중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성도의 모습은 사실 한국교회가 양산해낸 결과물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위한, 교회 안에서의 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러한 신앙의 초점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축복받자는 메시지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적 차원에서는 목회자와 성도의 모든 사역이 물리적 부흥을 위한 도구로 계획되고 진행됩니다. 제자훈련조차도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가신 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양육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세상 한 가운데 나아가 어떻게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원론적 신앙, 교회 안과 교회 밖이 다른 신앙, 성경의 이야기를 따른다면 (변화)산 위와 (변화)산 아래가 일치하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비난하고 염려하는 상황을 만들어낸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여! 신앙의 이원성을 극복하십시오!” 이것이 본회퍼가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던지는 하나의 도전적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화해하였습니다. 이 성육신과 화해는 하나님은 초월적 세계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세상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세상의 참 주 되심을 선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성도가 교회에서 고백하는 하나님과 세상 한 가운데서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르다면 그는 영적으로 간음하는 동시에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하셔서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성도에게는 결코 이원론이 인정될 수 없습니다.



5. 성육신의 세 번째 의미, 혹은 한국 사회를 위한 본회퍼


얼마 전에 우연하게 다문화가족 이야기를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주인공은 한국인 아버지와 에티오피아인 어머니를 둔 7살짜리 남자 아이였습니다. 참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정말로 가기 싫어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지하철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수많은 눈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낯선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문화사회적 에토스가 뼈 속 깊이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우리”라는 에토스입니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 초기에 겪은 당혹스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외국 학생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제 집사람을 가리켜 “our wife”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을 영어로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순간 외국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필자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친구는 “한국은 일처다부제가 허용 되느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정신세계를 “우리”라고 하는 에토스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우리 에토스가 지독한 동일화 전략이라는 데 있습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나 같은 고향 출신과 같이 서로 동일시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때 우리의식이 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에 속하지 않은 타자가 “우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이질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경우, 우리의식은 그 사람에 대하여 강력한 배타와 차별의 논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적은 그 아이는 항상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영원한 타자로서 낯선 눈길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화 전략은 지독한 연고주의, 혈연주의, 학연주의를 끊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문화의 시대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에토스라고 생각됩니다.


같음으로의 동일화 전략을 추구하는 “우리” 에토스에 대하여 본회퍼는 “내 안에 낯선 타자를 발견하라.”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 이와 같은 에토스의 근거가 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정체성이 혼합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자신이 아닌 것의 결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는 아주 낯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이 내포하는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안의 낯선 이들(Strangers to Ourselves)』에서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주장하듯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otherness)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우리와 다른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하도록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게 낯선 것을 발견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하여 있는 낯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항상 내재해있는 타자성을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낯선 사람으로 다가오는 타자의 차이(difference)를 인정하며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얻을 때 우리는 본회퍼가 말하는 폴리포니의 삶, 기뻐하는 타자와 함께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는 타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은 항상 약자 우선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사진출처: morguefile



5. 성육신의 네 번째 의미, 혹은 세계를 위한 본회퍼


지난 9월 전 세계인은 터키 해변으로 밀려온 3살짜리 꼬마의 시신이 찍힌 사진 한 장으로 인하여 충격에 빠지게 되었고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일란 쿠르디라 불린 이 아이는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그리스로 가던 시리아 출신의 난민이었습니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어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얼굴을 모래에 묻은 채 익사체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수없는 난민이 아일란과 같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 안전한 나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나라가 난민을 수용하는데 난색을 표합니다. 타인의 고통소리에 둔감해진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일란의 사진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움으로 돌아보게 만들었고, 잊고 살았던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등의 차이를 초월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눈 뜨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회퍼는 잘 알려진 “아래로부터의 관점(view from the below)”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옥중서간』에 수록된 유명한 “10년 후”라는 글에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세계사의 거대한 사건들을 아래로부터, 즉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자들, 혐의 받고 있는 자들, 학대 받는 자들, 권력이 없는 자들, 억압당한 자들, 멸시당하는 자들, 간단히 말해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경험이다.”(본회퍼, 『저항과 복종』, 60)


우리는 가진 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누가 많은 것을 가졌는가? 누가 큰 권력을 가졌는가? 누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인가?”에 익숙해져 있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을 점점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은 우리의 시선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할 것을 요구합니다. 앞에서 적었듯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진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육신은 인간화(humanization)를 위한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킨 해방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은 항상 약자 우선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려진 세리와 창기, 이방인에게 먼저 다가가 식탁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그들이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회복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본회퍼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였습니다. 무기력하게 고통당하심을 통하여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한 십자가는 “타자를 위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극적으로 계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아일란과 같은 난민은 오늘의 세상에서 가장 고통당하는 약자입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까지도 향유하지 못하는 비인간의 전형입니다. 그렇기에 아일란은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일란이 있는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그를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회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 한 가운데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또 다른 아일란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해방하시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고 고통당하는 아일란에게 다가가 고난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함께 고난당하고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김현수

연세대와 동대학원에서 철학을,

장로회신학대학과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 주제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숭실교회 담임 목회자이며, 본회퍼의 신학을 재료 삼아 

한국교회 갱신에 보탬이 되고자 애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