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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의 『조직신학』을 뒤적이며




 

1. 틸리히의 신학 – 세상을 향해, 그럼에도 더 기독교적인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미 식상한 소식이다. 어떤 이들은 위기의 알람음을 듣고도, ‘지금까지 나는 문제없었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면 된다.’ ‘나는 지금까지 문제없었는데, 왜 너는 무능하게 위기에 빠졌느냐?’ 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낙심하고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을 흡수하고 있는 일부 교회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개신교인 수는 감소하고 있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사회적 ‘매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두 가지 신학적 흐름이 감지된다. 첫째는 올바른 기독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흐름이다.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대부분의 교회는 성령운동, 은사운동, 교회성장에만 집중해왔다. 그 결과 교회는 덩치는 커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아이가 되어버렸고, 성장기를 지나 정체기, 침체기를 겪는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는 진정한 교회, 올바른 신학을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선포 이외에, 하나님과 성도의 삶에 관한 올바른 신학을 궁금해 하면서, 성경신학, 종교 개혁자의 신학, 청교도의 신학, 전통 교리를 공부하고 있다.


둘째, 기독교와 세상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흐름이 있다. 교회가 급속히 성장할 때,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교회가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보수적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회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진입하는 시민 사회를 나누는 벽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와 세상에 한 다리 씩 걸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세상 중에서 어느 한 쪽에만 집중하거나, ‘선데이 크리스챤’의 신앙생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답답해하는 기독교인들은 그 단단한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철학, 심리학, 사회학, 과학, 타종교 등을 공부하며 교회와 세상의 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기독교가 가진 진리를 확인하는 것과 변화하는 세상과 소통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언제나 신학의 과제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예전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세상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에 적합하게 말하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면, 기독교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져 무엇이 기독교의 진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적합하게 말해야 하는 것은 신학의 영원한 과제인데, 바로 그러한 과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신학자가 바로 틸리히였다.


틸리히는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 문화 등을 연구하면서, 그 심층에 담겨있는 종교적 물음을 발견하고, 그 물음에 기독교의 상징들로 대답하고자 했다. 틸리히의 이러한 작업이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었는지, 혹시 기독교의 진리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석해서 선포해야 한다는 신학의 과제를 선구적으로 수행했던 20세기의 신학자가 틸리히였고, 그의 신학작업의 결실이 그의 <조직신학>에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작품을 뒤적일 수밖에 없다.



2. 지금, 여기의 기독교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이 진술은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현실적으로 죄인이 아니며, 또 이 교리는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 역시 인간이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전근대적인 가치관의 표현일 뿐이므로, 현대인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의 법과 교회의 법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와 그 두 법이 분리된 현대 사회에 이 교리가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을 경우 저 전통적인 교리는 오해되거나 거부될 수밖에 없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은 기독교가 말하는 죄, 인간, 구원, 구원자 등이 무슨 의미인지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변화된 상황에 맞게 해석, 번역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국법을 어기는 죄와는 분명히 다른 개념일 것이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하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 생명 자체를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현대인의 인간관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말하는 죄인의 구원,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루는 구원자의 개념 또한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용어, 개념,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세상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이러한 번역작업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들은 또한 교회 안에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세계관, 가치관을 배우며 성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예전의 의미로만 새로운 세대에게 주어진다면, 새로운 세대는 자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떠나거나, 아니면 종교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믿음의 다음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세상의 이원적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나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용하는 개념, 기독교가 선포하고자 하는 진리는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틸리히는 실존주의적 철학 개념들을 사용하여, 죄를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이행에서 발생하는 소외로 해석한다. 기독교의 원죄 교리는 인간이 유전적으로 죄를 물려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조건의 불가피성을 지시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구원은 소외된 실존이 다시 본질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인 개념으로 구원을 설명하면서, 그는 기독교가 사용하는 개념들, 상징들을 하나하나 해석해 나간다. 그렇게 신학과 철학의 다리를 놓으면서, 전통적인 교회의 용어들을 세상이 이해할 수 있도록, 또 교회의 새로운 세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 바로 틸리히가 수행한 신학작업이었다.


기독교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용어, 개념,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세상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진출처: Unsplash)


    
3. 새롭게 해석된 전통


틸리히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통적인 기독교의 용어를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전통 신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틸리히는 신학생들이 어느 정도 라틴어에 익숙해지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를 통해서 정통주의 신학에 친숙해 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콜라 신학, 그리고 개신교적 스콜라신학인 정통주의 신학이 가진 학문적 엄밀성을 통해서 현대신학의 모호성을 극복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틸리히는 유럽의 엄밀한 정통주의 신학 전통과 미국의 자유로운 신학적 분위기를 모두 경험한 신학자였다.


유럽의 정통주의 시대에 작성된 장로교의 기본적인 신앙문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상태를 ‘창조된 본래의 상태,’ ‘타락한 상태,’ ‘구원의 상태,’로 구분하여, 각 상태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의 상태를 구분하여 인간을 설명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틸리히 역시 정통주의의 전통을 따라 인간의 상태를 본질의 상태, 실존의 상태, 생명의 상태로 구분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본질의 상태는 창조의 상태에 상응하고, 실존의 상태는 타락의 상태에 상응하며, 생명의 상태는 창조와 타락이 혼합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적 삶, 구원의 상태에 어느 정도 상응한다. (구원받은 인간은 ‘의인’이 아니라, ‘의인인 동시에 죄인’임을 기억하자.)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러한 체계를 이미 구상한 상태에서 틸리히는 계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종말을 해석해 나간다. 당연히 인간의 상태가 복잡하니 인간이 체험하는 계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종말에 대한 설명도 복잡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복잡함이 싫어서 하나님을 복잡하지 않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 설명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파악하여 ‘형상’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신성모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현대철학과 학문도 엄청나게 복잡한데, 그런 세상을 만들고 섭리하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교만일 것이다. 틸리히의 신학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고자 하는 틸리히의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그의 겸손의 표현이다.


틸리히의 의도는 전통적 교리를 과격하게 폐지하거나,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런 전통들이 오늘날에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런 그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틸리히보다 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 공부를 해서, 어떤 부분에서 틸리히가 정통을 벗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단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틸리히의 신학이 다르기 때문에 틸리히를 이단시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정통에 대한 자신의 무지 때문에 발생한 오해일지도 모른다.



4. <조직신학>을 읽기 위해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총 세 권의 분량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칼 바르트의 미완성작인 <교회교의학>과 틸리히의 완성작인 <조직신학>을 비교하면, 틸리히의 것은 ‘조족지혈’이다. 그런데 완성작의 분량이 적음에도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대단히 압축적임을 의미한다.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에는 각주도 거의 없으며 참고문헌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틸리히가 어떤 것을 참고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간단히 말하자면,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압축파일’이다. 그래서 압축파일을 풀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철학책이 아니라 신학책이지만, 일반적 신학책과는 달리 성경 인용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가 성경 어디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는지, <조직신학>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래서 폴 틸리히의 세 권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지금>를 공부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이 세 권의 설교집을 공부함으로써, 틸리히의 신학적 주장이 어떤 성경 본문에 근거하고 있는지, 또 그는 어떤 식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폴 틸리히, 『조직신학』 (한들출판사)



틸리히의 <조직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공부해야 할 것은 기독교 사상에 관한 그의 강의록,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19, 20세기 프로테스트 사상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이 강의록들을 공부해보면, 틸리히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보다도 초대 교부들로부터 더 크게 영향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 철학사에서 근대를 이성중심의 시대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틸리히는 근대를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종합과 분열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틸리히가 이해하는 사상사를 공부함으로써 그의 문제의식의 사상적 배경, 그가 사용하는 용어,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방법론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과 철학의 적극적인 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신학을 철학화 시킨다는 신학자들의 비판도, 철학을 오해했다는 철학자들의 비판도 있다. 그런 비판들에 대해서 틸리히가 자신의 신학방법을 변호하는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제 탐구>라는 소책자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스텐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20세기 신학>에서 틸리히의 이 책을 <조직신학>을 읽기 전과 후에 주의 깊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20세기 신학>, 519). 그만큼 이 소책자는 틸리히가 이해하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명확하고 쉽게 잘 정리해 준다.


이에 덧붙여서, <문화의 신학>, <프로테스탄트 시대>, <존재의 용기>, <신앙의 역동성>, <사랑, 힘, 정의> 등의 책은 틸리히의 <조직신학> 안에 담겨 있는 작은 테마들을 논문 또는 단행본으로 엮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들은 틸리히 <조직신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입문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의 신앙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필자는 이 글에서 틸리히 신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의 신학이 전통적 신학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신학에는 ‘자유주의’라고 규정될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 때문에 틸리히의 신학이 보수적인 한국교회에서 잘 수용되지 못함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선입견 때문에 틸리히에 대한 연구를 터부시하기에는, 20세기 신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분이 너무 크다. 또 이런 틸리히의 신학에 대한 관심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고 옥한음 목사님은 1980년 케넷 해밀톤의 <폴 틸리히>(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라는 소책자를 번역 출판하신 적이 있다. 옥 목사님이 틸리히 신학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셨고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이 틸리히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틸리히를 공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든 공부하고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틸리히가 살았던 시대 이후, 세상이 변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이 문화를 해석할 필요성이 발생한 것이고, 이 문화 속에 내재된 종교적 질문을 찾아내어, 이에 대해서 기독교의 대답을 제시할 과제가 독자들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다.




남성민

연세대학교 Ph.D.(2009.8., 논문제목 : 폴 틸리히의 구원론 연구)

고려신학대학원 M.div.(2013.2.)

현재 부천 참빛교회(고신) 부목사